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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사우당처사 부군 조윤수의 묘
유인 죽산안씨의 묘, 가나동 선대의 묘 아래 임좌(壬坐) 방향으로 원래 위치
우리 조씨는 창녕이 관향으로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신라,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귀족의 지위를 세습하였으며, 경화의 거족이 되었다. 중엽에 이르러서는 임진년, 정유년의
난리를 거치면서 한 지류가 남쪽으로 떨어졌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영암의 구림화산
(鳩林華山)에서 살게 되었다. 아마 태호공(兌湖公)부터 시작한 것이리라. 태호공은 휘가
행립으로 공의 고조부가 된다. 증조부는 휘가 경보요, 조부는 휘가 일주이고, 부친은 휘가
석침이니 원로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처는 경주최씨이다. 숭정 계미년 10월 22일
공을 낳았고, 병자년 9월 22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 54세이다.
공의 자질과 성격은 선비다우며, 우아하여 기골이 특별하고, 바름을 굳게 지키고, 재주를
보이기는 꺼리면서도 공경스럽게 하였으며, 부모를 섬기는 일에 성심을 다하고, 쌀을 100
리에 나누고 창고를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으니, 사방에서 덕을 칭송하고, 모은
재물로 계를 만들어 천 리 밖의 성현을 초빙하는 자금으로 썼다. 면계를 다시 만들어 이
면의 민역을 막았다. 거두는 것은 선조의 업에서 먼저 취하였으니, 예강(札糠)이 10권이
되었으며, 이름하기를 석실천금이라고 하여 집에 보관하고 있다.
대개 공의 재주와 덕, 행실이 아름다워서 가령 그 더함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충(忠)을
실천하는 것은 비록 성군을 만들어 은택을 백성에게 돌리게 되더라도 세도를 바탕으로
하고, 유학을 부흥시키는 일은 역시 보충이 될 구석이 없게 할 수 없다. 돌아보건대
나이가 아직 60이 되지 않았고, 자리는 아직 하나의 명을 얻을 수 없으니, 임천에서
졸박함을 지키는 것이다. 그 세상을 없애고 기운을 맑게 하는 것은 예부터 그러한 것이니
또한 어떻게 하랴? 아아! 공은 포의한사(布衣寒士)로 초야를 마르게 하고 그 행실은
아름다웠으니, 상세한 것은 유래된 가문의 문서를 보아야 하니, 이에 감히 간략하게 위와
같이 적는다.
신해 4월 일 세움. 현손(玄孫) 주승, 5대손 병삼 삼가 재배하여 올림. 병돈, 병진, 병휘
6대손 의환 삼가 씀, 동환, 유사(有司) 백환
朝鮮國四憂堂處士府君曺潤洙之墓
孺人竹山安氏之墓在加羅洞先考墓下壬坐之原
我曺氏昌寧厥惟舊哉自羅麗至我朝世襲冠冕爲京華巨閥至中葉過壬丁
之亂流落南鄕子孫因居于灵岩之鳩林華山盖自兌湖公始也兌湖公諱行
立於公爲高祖也曾祖諱敬輔祖諱一周考諱錫琛以大耋拜僉樞妣慶州崔
氏生公於崇禎癸未十月二十二日以丙子九月二十二日沒享年五十四公
資性儒雅氣骨秀特操守堅正才行諱敬事親盡誠負米百里開庫賻民頌登
四隣鳩財作禊以資千里省掃之賢中創面契以防一面之民役收聚先贅之
業札糠爲十卷名以石室千金藏于家盖公之才之德之行之美如使得其益
而行其忠則雖致君澤民貲世道興儒學亦不可謂無所補也顧乃年未滿六
旬位未得一命而守拙林泉以沒其世氣淸斁局從古己然亦復何爲嗚呼公
以布衣寒士乾沒草野而其花行之美詳閱於遺來家狀玆敢畧□如右
辛亥四月 日立 玄孫周承 五代孫秉杉再拜謹狀
秉敦 秉晋 秉輝
六代孫議煥謹書
東煥 有司栢煥
조선국사우당처사부군조윤수지묘
유인죽산안씨지묘재가라동선고묘하임좌지원
아조씨창녕궐유구재자나려지아조세습관면위경화거벌지중엽과임정
지란류낙남향자손인거우령암지구림화산개자태호공시야태호공휘행
립어공위고조야증조휘경보조휘일주고휘석침이대질배첨추비경주최
씨생공어숭정계미십월이십이일이병자구월이십이일몰향년오십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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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사월 일립 현손주승 오대손병삼
재배근상
병돈 병진 병휘
육대손의환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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