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영암의 금석문 덕진면
성균진사 현징 묘지명

주  소
덕진면 금강리 산 125-2
건립연대
숭정 갑자 9월(1744년?) *현징 : 1629~1702

본문

 

1710393465.736MCQgXdwYqE.png

1710393468.7539YqciUAvbJl2.png



유명조선 성균진사 행 광릉참봉 성산현공 묘지명

호남(湖南)은 예부터 많은 산과 물, 누대의 승지로 불렸다. 영암의 구림(鳩林)
은 낙토(樂土)라고 불렸고, 현씨(玄氏)의 죽림(竹林)에 있는 정자는 최고라고
여겨졌다. 참봉 휘는 징(徵), 자는 사휴(士休) 공이 지내던 곳이다. 공의 중부(仲父)
인 유후(裕後) 공도 참봉이 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정자의 이름 중에서 취음(
就陰)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뒤에 애체(哀替)로 이어졌으나 보전되지 못하자,
공이 슬퍼하고 돌아가 옮겨서 다시 짓고, 옛 경치를 회복하였다. 문곡(文谷)
김상국(金相國)이 듣고 찬탄하여 말했다. “사림(士林)의 독실함은 이 같은 것에서
직접 볼 수 있으리라!” 나중에는 완가(阮家) 부자가 허여한 의리에서 취하여
이름을 지었다. 문곡의 아들, 농암(農巖)과 삼연(三淵)이 서로 그 일을 찬미하였다.
공은 아직 늙지 않은 몸으로 벼슬을 관두었는데, 사대부들이 그 풍모가 지극함을
높이 산 경우가 많았다.
현씨 집안은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덕수(德秀)로부터 시작된
가문으로 성주(星州)를 본관으로 한다. 공의 고조(高祖)는 현감(縣監)을 지낸 구(
球)이고, 증조는 종사랑(從仕郎) 덕형(德亨)이며, 조부는 휘(諱)가 건(健)으로 주부
(主簿) 관직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휘(諱)가 진(振)이며, 뒤에
파평(坡平) 윤씨(尹氏) 부원군(府院君) 지사(之仕)의 후예이다. 공은 7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슬퍼하기를 어른같이 하였으므로, 중부가 그것을 걱정하여 데리고
돌아와서 기르면서 글을 가르쳤으니, 문장과 말에 일찍 성취가 있었다.
이어서돌아와모친을모셨고,경학(經學)과리학(理學)에있어서일가를이루었다.
비록 생활은 쇠퇴하였으나, 부모를 모시는 것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무자년(戊子
年)에한성에과거를보러가려하였으나,별을보고도망나온것은종신토록한으로
여겼다. 길복을 입게 되자 끝내 과거 공부를 폐하고자 하였으나, 중부가 강권하여
경자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800년) 새 임금께서 즉위하셨을
때, 광릉참봉에 제수(除授)되었다. 일찍이 직소(直所)에서 상례를 당했던 날에
지은 시에 스스로 서문을 붙이기를 어쩔 수 없는 감회라고 하였고, 이어 사양하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말하기를 “병이 들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문곡이 공과 가까이하고 싶어 은랑(殷郎) 자리에 궐석이 생기기를 기다렸으나, 공은
기꺼이 여기지 않았고, 끝내 거절하는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돌아가려는
마음 크니 막을 수 없습니다.”
공이 일찍이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돌아가신 부모를 모시는 의절은 오직 제사 지내는
것뿐이다”라고 하면서, 병이 깊은 것이 아니라면 목욕재계하고 제사에 임하기를 한번도
하지 않은 적이 없고, 제물이 어쩌다 갖추어지지 않으면 상심하고 탄식하며 곡기를
끊었고, 다리병을 앓아도 제사 지내는 날에는 엎드려 절하고, 슬픔의 정리를 다하였다.
제사가 끝나면 나와서 소리 내어 곡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니, 슬픔이 인근을 동요시킬
정도였다.
공은 사람됨이 두텁고 성실하였으며, 몸가짐은 게으르거나 단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집안에서는 놀잇감을 챙기지 않았으며, 향촌에서는 화목하고 겸손하게 하여 남의 과오를
말하지 않았고, 젊어서 글 읽기를 하여 늙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공이 나이 74세가 되던 임오년 정월 16일에 졸하자, 군 북쪽 입석산(立石山) 신좌(辛坐)에
매장하였다. 부인은 죽산(竹山) 박씨로 공과 합장하였다. 공은 자손이 없어서 조카인 호(
若)를 양자로 삼아 승계하였다. 호는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수초(守初), 수중(守中),
수범(守範), 수우(守愚)이고, 딸은 임상하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명직(命直), 명익(命益)과
진사 명덕(命德)인데, 명직은 내게 와서 공부하였는데 ,어느 날 와서 글을 청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죽림의 명성을 들었고, 이 정자에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었으나 아직 하지
못하였던데다, 공의 청렴한 절조를 우러러 사모하였으므로 명을 짓게 되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옛집을 이어 지음이라 정자 아니어도 높이 되었네.
완씨는 맑고 참되어 세속에서 벗어나 살았네.
벗하는 것은 속되지 않았고, 눈에 비치는 모습은 아이와 같았네.
충성이 두텁고 효성스러운데다 공경스러웠으니, 바로 신령한 노력인 바이고,
바다 같은 풍류를 즐겼으니, 또한 자연히 호방하였노라.
술잔 들고 노래하며 손님과 즐길 적에 노랫소리에 머리만 길었다오.
이 기이한 기운을 품고서 자연에서 세상 떴으니,
명으로 그가 덕에 거처하고 밝음을 드러냈음을 기록하노라.
숭정 갑자 9월, 삼주(三洲) 이재(李縡) 지음


有明朝鮮成均進士行光陵叅奉星山玄公墓誌銘

湖南故稱多山水樓坮之勝靈巖鳩林號爲樂土而玄氏竹林
之亭爲㝡叅奉諱徵字士休之居也公之仲父裕後亦恭奉不
仕有亭名就陰者後承哀替不能保有公傷之歸其直於人而
移搆之以復舊觀文谷金相國聞而歎曰士林之篤於親如是
夫遂取阮家父子契許之義以名文谷之胤農巖三淵相煥詠
歎其事公未老而謝官士大夫多高其風致玄自高麗兵部尙
書德秀籍星州高祖縣監諱球曾祖從仕郎諱德亨祖諱健官
主簿不就考諱振後妣坡平尹氏府院君之仕之伏公七歲而
孤哀毁如成人仲父憂之挈歸而鞠養且授以書文辭夙就旣
而歸奉母夫人經理成宗雖生事旁落而甘旨下之戊子隨計
赴京見星面奔終身以爲痛恨旣吉遂欲廢擧而爲仲父所強
中庚子進士庚申新化除 光陵叅奉嘗於直所過喪餘日有
詩自叙如不奈之懷仍卽謝歸人問其故則曰病不能也文谷
欲爲公取近使待 殷郎之闕而猶不肯乃追寄書曰歸袂浩
然不可挽公嘗曰吾鮮民也追養之節惟祭祀耳非甚病未嘗
一廢沐浴臨祭膳着或不備則傷歎郤食晩遘脚疾而祭日猶
俯伏致哀也祭而出號哭不止哀動隣里公爲人敦慤身不設
惰容家不寞戱具處鄕黨和遜不言人過惡少而劬書至老不
釋卷公年七十四壬午正月十六日卒葬在郡北立石山辛坐
原配竹山朴氏祔公無嗣取從子若昊子之岩昊生四男一女
守初守中守範守愚女適林尙夏曾孫曰命直命益進士命德
命直從我游來乞幽誌余久聞竹林之名欲一登斯亭而未能
且慕公淸操遂爲銘銘曰 故家肯構匪亭爲高小阮淸眞脫
屣塵囂所友不俗眼底兒曺忠厚孝弟寔神攸勞湖海風流亦
足自豪觴詠娛賓絃誦造髦抱玆奇氣老死蓬蒿銘以志之處
德載昭 崇禎甲子九月日三洲李 縡撰

유명조선성균진사행광릉참봉성산현공묘지명

호남고칭다산수누대지승영암구림호위낙토이현씨죽림
지정위최참봉휘징자사휴지거야공지중부유후역공봉불
사유정명취음자후승애체불능보유공상지귀기직어인이
이구지이복구관문곡김상국문이탄왈사림지독어친여시
부수취원가부자계허지의이명문곡지윤농암삼연상환영
탄기사공미노이사관사대부다고기풍치현자고려병부상
서덕수적성주고조현감휘구증조종사랑휘덕형조휘건관
주부불취고휘진후비파평윤씨부원군지사지복공칠세이
고애훼여성인중부우지설귀이국양차수이서문사숙취기
이귀봉모부인경리성종수생사방락이감지하지무자수계
부경견성면분종신이위통한기길수욕폐거이위중부소강
중경자진사경신신화제 광릉참봉상어직소과상여일유
시자서여불나지회잉즉사귀인문기
고칙왈병불능야문곡욕위공취근사대 은랑지궐이유불긍
내추기서왈귀몌호연불가만공상왈오선민야추양지절유
제사이비심병미상일폐목욕임제선착혹불비칙상탄극식
만구각질이제일유부복치애야제이출호곡불지애동인리
공위인돈각신불설타용가불막희구처향당화손불언인과
악소이구서지노불석권공년칠십사임오정월십육일졸장
재군북립석산신좌원배죽산박씨부공무사취종자약호자
지암호생사남일녀수초수중수범수우녀적임상하증손왈
명직명익진사명덕명직종아유래걸유지여구문죽임지명
욕일등사정이미능차모공청조수위명명왈 고가긍구비
정위고소원청진탈사진효소우불속안저아조충후효제식
신유노호해풍류역족자호상영오빈현송조모포자기기노
사봉호명이지지처덕재소 숭정갑자구월일삼주이 재찬






Copyright © 영암문화원 All rights reserved.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