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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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군서면

월출산 도갑사 왕사 묘각화상 비명

주  소
군서면 도갑리 4
건립연대
숭정 기사 2월~계유 6월(1629년~33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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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도갑사 왕사 묘각화상 비명

대저 바다가 크고 깊다고 일컬어지는 까닭은 맑고 더러움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이요, 도를 무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이유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구이든 그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도를 터득하여
부처님의 삼매 속에서 유희하면서 고통의 바다 속에서 반야(般若)의 배를 타고
중생을 구제한다면 이는 세상에 있어 가장 귀중한 존재이므로 대개 이러한 분은
매우 드문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과거 묘각왕사가 바로 그러한 분이다.
스님의 휘는 수미이고 옛 낭주 출신이다. 최씨의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꿈에
특이한 사람으로부터 구슬을 전해 받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였고, 태어날 때 특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명랑하여 세속을 멀리하려는
뜻을 품었다가, 13살 때 낭주의 서쪽 월출산 도갑사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 20살이
되어서는 비구계를 받은 다음 지체 없이 여러 강원(講院)을 다니면서 삼장(三藏)을
공부하였다. 속리산 법주사에 이르러 나이도 같고 이름도 같은 신미(信眉)라는 사미
(沙彌) 스님을 만나 막역한 사이가 되어 서로 탁마하면서 대장경을 배우고, 계율을
읽혀서, 자비한 얼굴과 도골(道骨)로써 눈의 광체는 별빛처럼 빛났고, 목소리는
낭랑하며 온화하고 말재주가 뛰어났다.
학자들이 모두 그를 추앙하여 두 감로문(甘露門, 열반에 도달하는 문)이라고
일컬었다. 명성이 자자하여 점점 더욱 두각이 드러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동학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본분사(本分事, 처음부터 부처와 중생이 하등의
차이도 없이 완전하게 동일한 모습이라는 이상적인 경지)를 등지고 있는 것은 마치
승요화상(僧繇和尙)이 인물화를 잘 그려서 묘화(妙畵)라고 하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고 말하고, 드디어 배우던 학문을 던져버리고는 삿갓을 쓰며, 짚신을
신고는 선방으로 출입하면서 참선을 시작하였다.
처음에 구곡각운 스님을 친견하였으나, 뜻이 계합하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등계존자인 벽계정심선사(碧溪正心禪師)를 찾아갔으나 회명부새(晦冥否塞)한 불교
사태를 만나 선의 경지는 황폐하여 적막한 것이 마치 새벽하늘에 사라지는 별빛과
같이 희미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침 스님께서 선종판사에 선출되어 불교의 억압정책으로 말미암아
둑이 터져 흐르는 물결을 막아 이미 기울어진 종단 운명의 물결을 일시나마
만회하였으니, 참으로 종문(宗門)의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스님은 곧
도갑사로 돌아왔으니, 이는 본사를 잊지 아니하였음을 보인 것이다. 도선국사가
비보 사찰로 지어진 선사의 도장이 황폐하고 몰락하여 먼지 쌓인 우거진 풀밭이 된
현장을 보고, 대중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 복구하지 아니하고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하였다.
더불어 성상께서 복구토록 하라는 하명이 있어서 묘각화상의 문도인 홍월스님으로
하여금 복구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중창과 불사를 마치고 보니 도량을 장엄한 모든
부분이 관철되었으므로 마치 강궐(絳闕)과 청도(淸都)가 공중으로부터 떨어진 것과
같이 일신되었다. 또 영응대군이 단월(시주)이 되어 약사여래불상 3구를 제작하여
불전에 봉안하였는데, 때는 천순(天順) 기원 원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도들의
사사(四事) 공양이 다투어 들어오고, 육화(六和) 대중이 떼를 지어 운집하여 그
수효는 일천 명에 가까이 이르렀다. 용상대덕(龍象大德)이 위요하여 종풍(宗風)을
크게 진작하였다. 그 후 세조께서 예를 갖추고 스님을 영접하여 왕사로 책봉하고,
묘각왕사라는 호와 함께 자색 가사 한 벌을 올렸다.
그 후 왕은 자주 편지를 보내어 위문하였고, 상모 불자와 유리 염주도 선사하였다.
고관대작의 부인들과 공경(公卿), 묵수(墨綬), 동부(銅符)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께
서쪽을 향하고 꿇어앉아 법을 묻고, 북쪽을 향하여 예배한 것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으니, 당시에 왕과 신하, 사부대중의 존경을 한 몸에 지녔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종문(宗門)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하여 최후 유촉한 다음, 조용히 입적하였으니, 세수는 63세요, 법랍(法臘)은 51
하(夏)였다. 절의 동쪽 기슭에 탑을 세우고 함께 기적비를 세웠으나, 이미 글자가
거의 마멸되어 제대로 판독할 수가 없었다. 당시 주지인 청신화상이 다시 비를
세워 오래도록 썩지 않게 하고자 하기 위하여 그 사실을 적어 나를 찾아와 비명을
청탁하므로 영원히 새겨 이르노라. 명(銘)에 이르기를,
하늘처럼 높고 높은 월출산이여 남쪽으로 뻗어가서 남해를 진압하니,
그 정기는 뛰어나신 영재를 낳고 특이하게 태어나신 도선국사여!
비보사찰 창건주인 도선국사는 국민들의 정신지주 국사로 추대하고,
중창주인 수미대사를 왕사로 책봉하니 세조대왕 묘각이라 호를 받치네.
구산선풍 쇠퇴하여 불이 꺼지니 임제선풍 사라진 후 왕사가 중흥하네.
세월따라 그 선풍이 흥폐를 거듭하니 종과 북을 크게 쳐서 진작하였네.
첫 번째로 남긴 분도 묘각국사요 두 번째로 전해 줌도 묘각이니 수미이시네.
영원토록 이 스님을 잊지 않으려면 지극정성으로 돌에 새겨 전시함이 제일일세.
숭정 기사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계유년 6월 일에 비를 세우고,
해동사문 백암성총이 비문을 짓고 아울러 전액까지 쓰다.

[음기]
산중대선사(山中大禪師)
일원 일환
항십 왕한 탁성 거극 법령 종익 준민 왕섬 정붕 천우 시습 지읍 태습 근훈, 선덕질(禪德秩)
시주질(施主秩), 시주지사(施主持寺)능준
봉선 통정(通政)해월 판사(判事)혜협 가선(嘉善)신붕 종운 신밀 김충양 배필남 판사(判事)
청□ 판사(判事)성은 왕현응 윤선이 노천 김상연 문원
통정(通政)수영 판사(判事)혜안 통정(通政)종현 통정(通政)해섬 통정(通政)진혜 통정(通
政)행협 통정(通政)경순 가선(嘉善)극행 통정(通政)경우 행주지(行住持)경해 통정(通政)
묘윤 지전(持殿)행해, 서기찬문(書記贊文), 간사(諫事)취은 삼강(三剛)수익 수승(首僧)찬오
통정주지(通政住持)청선, 본사질(本寺秩)
석간(石于), 유일립 유태인 유태육 야장 황금 임생룡 성능 신필 승현 승민, 각자(刻字)
화주통정(化主通政)청신, 물기(刀己), 공양주(供養主)초령 종선 천헌 자운 별좌(別座)철인,
연화질(緣化秩)

月出山道岬寺王師妙覺和尙碑銘(전액)
月出山道岬寺王師妙覺和尙碑銘幷序
夫海之所以稱大者由無皎潔之淸道之所以難名者以無赫然之觀也若廼得
難名之道遊戱拂
門三昧舟航苦海爲世所重者盖指不多屈而近古於妙覺 王師見其人焉師
諱守眉古朗州人
生於崔氏母夢異人遺珠而孕生時異香滿室幼時英爽有邁俗之志十三投州
西月出山道岬寺
出家旣冠受具翶翔講肆抵俗離山法住寺遇沙弥信眉同歲同名與之俱琢磨
磋切讀大藏習昆
尼幷慈容道骨眉彩華然詞氣朗潤辯才無礙學者皆推之謂二甘露門浸涙己
露頭角矣居無何
謂同學曰我所負者其猶僧繇盡人物雖曰妙盡終非涪者遂棄所學擔簦躡屩
出入禪窟初叅龜
谷不契晩入登階之室然値晦冥否塞之秋禪席荒虗寥落稀若晨星師被選判
禪宗事防橫决之
波廻旣倒之灡宗門有頼焉尋還道甲以示其不忘本也慨先國師裨補道塲幾
至草廢乾沒落在
凉烟茂草中謂衆曰吾儕其忍坐視而不復耶况 聖上有命使其徒洪月幹其事
重新復舊貫莊
嚴之妙疑絳闕淸都從空而墮也且以永膺大君任大檀越敬塑藥師如來三軀
安于紺殿時天順
紀元之元年也由是四事騈集六和膺至以至千指圍繞龍象蹴踏宗風遂大振
焉嗣後光廟備禮
奉迎冊封王師錫以妙覺師號及紫伽棃一襲又頻下手札以慰問象毛拂子琉
璃數珠搢紳縫掖
自公卿以至墨綬銅符西向而問北面而禮者不可殫述其爲一時所重從可知
矣某年某月某日
即召門弟子囑以宗門大事泊然蟬蛻閱世六十三坐臘五十一塔于寺之東麓
紀德有碑己沒字
而不可讀今住持淸信欲重鑱而圖存不朽書其事來乞銘銘曰
月岳穹隆鎭南海濱 孕靈毓秀篤生異人 前有詵公號爲國老 後曰王師妙
覺是己
禪風旣熄王師重扇 且復起廢鐘鼓大振 一則妙覺二則妙覺 永備無忘宜
乎勒石
崇禎己巳二月日始癸酉六月日立 海東栢庵沙門性聰撰幷書篆

[음기]
山中大禪師
一遠 一環
亢什 旺閑 卓性 豦克 法玲 宗益 俊敏 玉暹 政朋 天祐 時習 智揖 太習 仅訓
禪德秩
施主秩 施主持寺能准
捀禪 通政海月 判事惠冾 嘉善愼朋 宗運 愼密 金忠良 裴必男 判事淸□ 判事
性誾 王玄應 尹善伊 魯天業 金尙璉 文遠
通政守車宁 判事惠眼 通政宗玄 通政海暹 通政眞惠 通政衍冾 通政敬淳 嘉善
克行 通政敬祐 行住持敬海 通政妙允 持殿衍海 書記贊文 諫事翠誾 三剛守
益 首僧贊悟 通政住持淸善 本寺秩
石于 劉一立 劉台印 劉台六 冶匠 黃金 林生竜 性能 信必 勝玄 勝敏 刻字
化主通政淸信 刀己 供養主楚令 宗善 天憲 自云 別座哲印 緣化秩

월출산도갑사 왕사묘각화상비명(전액)
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명병서
부해지소이칭대자유무교결지청도지소이난
명자이무혁연지관야약내득난명지도유희불
문삼매주항고해위세소중자개지불다굴이근
고어묘각 왕사견기인언사휘수미고낭주인
생어최씨모몽이인유주이잉생시이향만실유
시영상유매속지지십삼투주서월출산도갑사
출가기관수구고상강사저속이산법주사우사
미신미동세동명여지구탁마차절독대장습곤
니병자용도골미채화연사기낭윤변재무애학
자개추지위이감노문침루기노두각의거무하
위동학왈아소부자기유승요진인물수왈묘진
종비부자수기소학담등섭교출입선굴초참구
곡불계만입등계지실연치회명부새지추선석
황허요낙희약신성사피선판선종사방횡결지
파회기도지란종문유뢰언심환도갑이시기불
망본야개선국사비보도장기지초폐건몰락재
양연무초중위중왈오제기인좌시이불복야황
성상유명사기도홍월간기사중신복구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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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식왕사중선 차복기폐종고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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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기사이월일시계유육월일립
해동백암사문성총찬병서전

산중대선사
일원 일환
항십 왕한 탁성 거극 법령 종익 준민 왕섬
정붕 천우 시습 지읍 태습 근훈 선덕질
시주질 시주지사능준
봉선 통정해월 판사혜협 가선신붕 종운
신밀 김충양 배필남 판사청□ 판사성은
왕현응 윤선이 노천 김상연 문원
통정수영 판사혜안 통정종현 통정해섬
통정진혜 통정행협 통정경순 가선극행
통정경우 행주지경해 통정묘윤 지전행해
서기찬문 간사취은 삼강수익 수승찬오
통정주지청선 본사질
석간 유일립 유태인 유태육 야장 황금
임생룡 성능 신필 승현 승민 각자
화주통정청신 물기 공양주초령 종선 천헌
자운 별좌철인 연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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