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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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서호면

이조판서 박호 묘갈

주  소
서호면 엄길리 130-14
건립연대
숭정기원후 80년 정해(1707년) *박호 : 1586~166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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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이조판서 행 첨지중추부사 박공 묘갈명(전액)

유명조선국 절충장군 첨지 중추부사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박공 묘갈명 병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영 경연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남구만 지음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류상운 씀
통정대부 이조참의 지제교 윤덕준 전서
반남의 박씨는 신라 시조에서 발원해서 고려 말기에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본조에
와서 번성하여 드디어 큰 문족이 되었다. 사간으로서 영의정에 추증된 문강공 소
(紹)는 바른 학문과 올곧은 행실로 유명했고, 대사헌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반천부원군 응복(應福)은 의인왕후의 숙부였으나 왕후의 은전을 입지 않고 재덕으로
발탁되었으며, 관찰사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동열은 문장과 기량으로써
당세에서 추존을 받았다. 이후 삼세를 계승하여 공에게까지 이르렀다. 선비는
고령신씨로 좌의정 문경공인 용개의 현손이고 동지중추부사인 벌(埰)의 따님이다.
공의 휘는 호(濠)이고 자는 백유(伯游)이다. 선조 19년 병술년(1586)에 태어나서
기유년(1609)에 진사를 하고, 갑자년(1624)에 조지서별제로 임용되어 을축년(1625)
에 익위사시직으로 옮겨 부솔로 전임했다가 위솔(衛率)로 승진하였다. 병인년(1626)
에는 남평현감으로 나가서 5년 만에 체임되어, 신미년(1631)에는 부여현감이 되고,
을해년(1635)에는 종부시주부로 임명되었으며, 무인년(1638)에는 영주군수로
나가서, 임오년(1642)에 향리로 물러났으니 오랫동안 벼슬에 있었던 것이다. 무자년
(1648)에는 호조정랑으로 임명되었으나 바로 익산군수로 나가서, 신묘년(1651)에는
남원부사로 승진하고, 계사년(1653)에는 병으로 인해 해임되어 병신년(1656)에는
군자감정이 되고, 기해년(1659)에는 제용감정으로 승진했으며, 임인년(1662)에는
다시 군자감정이 되고, 을사년(1665)에는 다시 제용감정이 되었다가 병오년(1666)
에는 수직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공은 현종 8년 정미년(1667) 12월 7일에
돌아가셨다. 처음은 아들 참판공의 귀현으로 가의대부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으나
뒤에 증손인 금평위의 귀현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증직이 내려졌다. 양주
금촌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노성하다는
말을 들었으며, 선생과 여러 어른들께서 모두 공에게 기대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과거의 선발에 막혔으니, 동량의 큰 재목이 굽혀서 문지도리의 작은 쓰임으로
쓰이다가 마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의 치적으로 말하면 남평현감으로
있을 때 엄하고도 관대하여 묵은 범죄는 물론이고 새 범죄도 용납하지 않았으니,
모든 관민이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여 한 달도 못되어 한결같이 칭찬하였다.
부여현감으로 있을 때는 전정(田政)을 균등하게 하고 은결(隱結)을 개혁하였으며,
주즙(舟楫)을 설치해서 부교(浮橋)를 혁파하였으니 자기를 바르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함이 모두 이러하였다. 그리고 또 영주와 익산의 군수로서 치적이 더욱
드러나 이 때문에 남원부사로 발탁이 되었는데, 사람은 많고 풍속은 악하여 더욱
다스리기 어렵기로 이름이 났으나 위력으로 검속하고 은애로 어루만지니 범죄자와
선량한 사람이 모두 복종하였다. 포도관이 사경으로 나가지 않아도 경종도 들리지
않고, 검사관이 토지를 살피지 않아도 자백하는 자가 많아졌으니, 공은 내행이
순정하고 완비되었던 것이다. 부친상을 당해서 두 아우와 함께 3년을 여묘에서
지냈다. 어머니께서 연로하셨는데 공도 70세나 되었으나 어머니 곁에서 섬기는데
소년 때와 다름이 없었다. 두 아우들과 서로 지기가 되어 만년에는 부안의 유포에
자리를 잡고 세 채의 집을 지어서 조석으로 즐기면서 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으나 두
아우가 먼저 죽어 비로소 서울집으로 돌아왔다. 공은 교류하기를 드물게 하였으나
뜻이 통하는 친구와는 독실한 정이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없어 직위의 높고 낮음으로
차별하지 않았다.
인조 을해년(1635)에 정부에서는 국경 문제로 인재를 등용하려는데 여러 대신들이
공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공의 아우인 대헌공 황(潢)이 “우리 부모님께서 늙으셨는데
나도 이미 국가에 몸을 바쳤으니 형이 만약 변방으로 나간다면 누가 우리 부모를
받들겠는가?”하며 여러 공들에게 간청하여 등용을 막았다. 그 후에 추천된 자가
혹 방백으로 발탁이 되니, 상국 최명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전에 아무개를
등용했더라면 볼 만하였을 것이니 어찌 이런 사람들과 한 무리에 들겠는가?”
하였다. 전부인은 평산신씨로 영의정 문정공 흠(欽)의 딸로서 공보다 1년 뒤에
태어나서 50년 먼저 돌아가셨다. 부인의 동생인 동양위 익성이 묘지를 쓰기를 “자식·
아내·며느리·어머니의 도리를 모두 법도에 맞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계배(繼配)는
파평 윤씨로 헌민(獻民)의 따님이다. 임인년(1602)에 태어나서 56세로 돌아가셨다.
종질인 좌의정 세채(世采)가 공의 묘지를 썼는데 “부인은 어질고 효성스러워 집안
일을 잘 돌보았다”고 하였다. 두 부인은 모두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4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인 참판 세모(世模)와 첨지 세해(世楷), 딸인 전한(典翰) 이수인의 처와
첨지 임일유의 처는 전부인의 소생이다. 현감 세표(世標) 학생 세격(世格)과 우의정
이숙(李蚣)의 처는 계배의 소생이다. 서출의 2녀는 학관 이시득과 충의위 이호남의
처가 되었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의 수는 너무 많아서 다 쓸 수 없으나 그 중 문적에
오르고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몇몇 있으니, 태장은 종손으로서 지금 예빈정이고,
그의 장남인 금평위 필성은 효종의 숙녕옹주와 결혼하였다. 예빈시정이 나를 잘
안다는 이유로 묘지명을 청하기에 이에 명(銘)을 짓는다.
공의 지체와 문벌을 묻는다면 화려하고도 굉장하고,
공의 인품을 본다면 완정하고 성숙하였네.
누구만 못할까, 공경이 아닐 뿐이로다.
관직에 국한되었으니 또 무슨 길이 있을까.
가시나무에 얽혀 난새와 봉황이 울고 있고,
작은 길 험한 데에 기린이 걸어가네.
세상에서 인재를 선택함에 도리어 영재 버려두니,
공의 소득 논한다면 또한 형통했다고 할 것이다.
효성과 우애로 정치하여 이미 명성 높았으니,
낮은 관직 낮게 보지 않고 이에 이름을 이루었네.
평안하게 천수를 누려 복록 또한 가득한데,
자손들 이어 현달하니 저승길도 영화롭다.
선하고 덕 있는 그 결과는 이에 틀림없는 것이니,
비유하면 봄에 밭을 갈아 가을에 추수함과 같은 것이네.
나는 이에 명(銘)을 지어 유택에다 표장하니,
후에 상고하는 자는 숨겨진 일을 밝힐 수 있으리라.
숭정기원후 80년 정해년 월 일 세움

贈吏曹判書行僉知中樞府事朴公墓碣銘
有明朝鮮國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贈資憲大夫吏曹判書鉗知義禁府
事五衛都摠府都摠管朴公墓碣銘並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経筵弘文館 藝文館春秋館觀
象監事 世子師南九萬撰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経筵弘文館 藝文館春秋館觀
象監事 世子師柳尙運書
通政大夫吏曹參議知製敎尹德駿篆
潘南之朴源於羅祖顯於麗季盛於 本朝遂爲塗莘之門司諫 贈領議政
文康公諱紹以正學直道名世大司憲
贈領議政潘川府院君諱應福乃 懿仁后叔父而才進德選非以 恩也觀
察使 贈吏曹參判諱東說文章器業
爲時所推三世相承以及於公騙高靈申氏左議政文景公用漑之玄孫同知
中樞府事撥之女也公諱濠字伯游以
萬曆丙戌歲生己酉選上庠甲子除造紙署別提乙丑移翊衛司侍直轉副率
陞衛率丙寅拜南平縣監居五年遞辛
未拜扶餘縣監乙亥遞拜宗簿寺主簿戊寅拜榮川郡守壬午遞歸鄕里棲
遲者久之戊子拜戶曹正郞旋拜益山郡
守辛卯陞拜南原府使癸巳以憂解丙申拜軍資監正己亥轉濟用監正壬
寅復正軍資乙巳復正濟用丙午以壽陞
秩拜僉知中樞府事丁未十二月七日卒初 贈嘉義大夫吏曹參判用子參
判貴也後 贈資憲大夫吏曹判書用
曾孫錦平尉貴也葬于楊州金村負巽之原公自幼已有老成名先生鉅公
皆以公輔期之竟屢於甲乙之選使梁棟
之材屈爲聞潼之用而止耳雖然亦言其吏績其監南平嚴而有容不問宿
奸不貸新犯吏民畏愛不期月翕然稱治
其監扶餘均田政革隱結設津船罷浮橋正已便民類如此其守榮川及益
山治效益著以最擢授南原物衆俗臀尤
號難治而威蝨恩撫姦良咸服游泯不出四境而則鼓不聞檢拷不及田疇
而首實自多公內行純備遭參判公憂與
二弟廬墓終喪大夫人年高公亦年及七十而服事左右無異於少時及二
弟自相爲知己晩寓扶安之柳浦鼎立三
舍怡愉朝夕爲終焉計二弟歿始歸京第公罕於游從而其投分許與若而
公則情好之篤至老如一未嘗以升沈位
遇之殊有間也 仁祖乙亥歲 朝廷有邊虞命擧佚才當路諸公欲以公應
命公弟大憲公潢曰吾親老矣吾已委
身於朝矣兄若又出爲世用誰當奉吾親者力懇于諸公而止之後被擧者
或擢至方伯崔相國鳴吉歎曰向使某得
擧其可觀豈但與此君等伍而已耶前夫人平山申氏領議政文貞公欽之
女後公一年生先公五十年卒夫人之弟
東陽尉翊聖誌之曰爲子爲妻爲婦爲母之道俱有可紀後夫人坡平尹氏
獻民之女以萬曆壬寅歲生年五十六卒
公之從姪左議政世采誌公稱夫人賢孝宜家二夫人葬疊蟄公公有四男
三女參判世模僉知世楷典翰李壽仁室
僉知林一儒夫人前出縣監世標學生世格右議政李蚣夫人後出側出女
二人爲學官李時得忠義衛李豪男妻內
外孫曾男女多不可盡記而其登文籍居通顯者又若而人泰長以宗孫方
爲禮賓寺正而正長男錦平尉弼成尙
孝宗淑寧翁主正君以余爲辱知請銘公墓銘曰
問公之地華且宏而 觀公之人完且成而 誰之不如不公卿而 局於公車
又焉程而 棧棧枳棘鸞鳳鳴而
仄仄微逕騏驥行而 世之阮材固遺英而 論公所得亦云亨而 孝友爲政
旣有聲而 不卑小官鳳成名而
壽考平康福履盈而 子姓繼貴泉塗榮而 爲善之報此爲貞而 譬如秋穫
在春耕而 我作銘章以表塋而
後有考者昧可明而
崇禎紀元後八十年丁亥 月 日立

증이조판서행첨지 중추부사박공묘갈명
유명조선국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
도총부도총관박공묘갈명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남구만찬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 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류상운서
통정대부이조참의지제교윤덕준전
반남지박원어나조현어려계성어본조수위도신지문사간 증영의정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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