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 이조참판 행 함평현감 전공 신도비명(전액)
유명조선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증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통훈대부 함평현감 나주진관 병마절제도위 전공 신도비명 병서 덕은 송환기 글을 짓고, 해주 최병손 글씨 씀 공의 휘는 몽성이요, 자는 응상이시니, 먼 옛날 조선조 숙종 11년 을축년(1685)에 호남의 유림들이 공의 순절 사실을 도백에게 호소하여 도백이 이를 받아 드려 임금에게 소를 올리니 임금으로부터 상전이 내려졌다. 그 교지 가운데에 특별히 국란에 임하여 의로서 항거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여덟 자를 써서 내리셨으니, 아아! 장하도다. 이는 가히 오랜 세대에 전해 가게 할 생각이셨도다. 천안의 전씨는 백제 공신이신 환성군 휘 섭을 시조로 하고 고려조 초에 휘 홍술이 있었으니 영산군이시며, 조선조에 들어와 휘 문식이 있으시니 참판이시고 시호는 문평이시니 이분이 공의 10대 조요. 증조의 휘는 승문이시니 이분이 영암에서 처음으로 사셨으며, 할아버지의 휘는 윤이시니 현감이요. 아버지의 휘는 방필이시니 첨지중추부사이시며, 어머니는 청주한씨이시니 참봉 천수의 딸이시다. 공이 명종 16년 신유년(1561)에 낳으시니, 예의에 맞는 몸가짐이 뛰어나고, 풍채가 크셨으며, 용맹스럽고, 매우 출중하셨다.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섬기심에 정성을 다하셨으며, 유형의 물질 봉양을 지극하게 하였다. 공의 아버지이신 첨추공이 과거 공부에 힘쓰라고 책망을 하시면 말씀하시기를, 부모를 멀리 떠나 부하고 귀함은 빈천한 것만같지 못하므로 슬하에서 오래도록 모시고 싶다 하므로, 아버지의 뜻으로도 다시 강압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과 공부를 하여 선조 16년 계미년(1583)에 급제하셨다. 과거 급제를 축하하는 연회를 베푸는 날 홀로 침실로 들어가 흐느껴 울며 눈물을 흘리니 그 아우가 괴이하게 여기며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내 남아로서 한번 국은을 입으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 이제부터 죽음을 각오할 것이므로, 효도를 다하지 못할 것이 두려울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해(1584)에 북도를 방위하기 위해 나아갔다. 병사 신립이 말하기를 “그는 큰 그릇이 될 것이다”라 하고 그의 막하에 서 머물게 하여 매사를 반드시 공에게 묻고 의논하였다. 처음 벼슬은 무겸선전관이었고 다시 군기시주부로 있다가 그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던 중 임진란 (1592)이 일어나자 고공 경명과 김공 천일이 서로 이어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두 아우에게 작별하며 말하기를 “나는 나라에서 녹을 먹는 사람으로 하루라도 집에 있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너희가 늙으신 어머니를 잘 모시고 조심해서 피란하여라.” 라고 이르고 바로 고공의 휘하에 나아가 금산 싸움에 참전하였다. 그 싸움에서 패전하게 되니, 공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주상께서 멀리 계시는데 어찌 헛되이 죽어야 하느냐?” 하고 드디어 화살을 맞으며 채찍을 휘둘러 말을 몰아 포위망을 뚫고 수십 리를 달렸다. 그러고 나서 말에서 내려 갑옷을 풀어보니 몸에는 여섯 군데나 상처를 입었으며, 말꼬리도 왜적의 칼날에 끊기었다. 전라관찰사 이광이 공을 불러 편비장으로 삼으니 공은 남평 구례 두 고을 수령과 별장 남응길과 더불어 진산 조림원에서 수비하는 역할, 을 맡았다, 왜적이 물러감에 공은 마침내 왕이 계시는 행재소에 나아가니 곧 선전관에 제수 되었다. 계사년(1593)에는 선조왕이 한양으로 돌아 오공은 함평현감에 제수 되었다. 을미년(1595)에는 관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계셨다. 병신년(1596)에 공은 국란에 임하여 충의를 다한 분으로 천거되어 특별히 이성현감에 제수 되었으나 어머니가 노쇠하므로 면해줄 것을 청원하여 고향에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두 번 다시 침범하여 미친개처럼 겉잡을 수없이 날뛰니 공이 또한 분개하여 한탄하며 “ 내 몸은 이미 나라에 바쳤으므로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함은 옳지 못하다.” 하고 이내 막내아우 몽태에게 이르기를 “나는 차마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 말씀을 드릴 수 없으니 네가 잘 말씀드려 어머니 생각을 너그러이 해야 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중제인 몽진, 전 첨사 유장춘, 생원 서희서, 유학 박문 김덕흡 유희춘 김덕란 서건 등과 함께 정예를 모병하고 거점을 나누어 밤재 좁은 골에 매복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적을 격살하였다. 이에 군중은 공을 장수로 추대하고, 유장춘 박문립을 좌우부장으로 삼아 월출산에 진을 치고 방어하였다. 그러던 중 몰려오는 적선 수십 척이 은적산 뒤편 해암포에 정박해 놓고, 위아래 산마을과 들녘에서 약탈을 매우 심하게 하므로 공은 의병을 이끌고 나아가 군사를 열 개 부대로 나누고 유점동에 머물며 장차 골짜기 어귀에서 맞아 치려는데, 잠시 후 왜적 수백 명이 포구 위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이에 공은 언덕에 올라 둥글게 진을 치고 노약자들은 비탈 뒤에 숨어 나무 사이에 들락날락하면서 은은하게 비치게 하여 군사처럼 보이게 하였으며, 몸을 바쳐 앞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싸워 왜적을 대패시켜 물러나게 하였다. 그다음 날 아침에 왜적이 다시 큰 떼를 이끌고 진격해 오며 포와 화살이 비 오듯 하니 공은 얼굴빛을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고 서서히 군중에게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는 것인데 차라리 의를 지켜 죽는다면 이 또한 장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힘을 다해 싸운다면 전부를 얻는 이치가 없지 않은 것이니 너희는 두려워 몸을 움츠리지 말라” 하고, 드디어 큰 나무에 의지하여 한 사람에게 시켜 화살을 가져오게 하여 적을 향해 쏘아대니 적도 홀연 응사했으나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왜적 일대대가 산언덕을 돌아 공격해 와, 더욱 급박하게 가까이 밀어닥쳤다. 이때 공의 아우 몽진이 총알에 맞아 장렬하게 죽고 좌우의 대열이 무너져 흩어져 버렸다. 공은 홀로 유장춘과 더불어 꿋꿋하게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화살을 쏘았으나 화살이 다하고 시위가 끊어졌다. 이내 공은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 나라를 위해 적과 싸우다 죽는 것은 신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나 늙으신 어머니를 두고 이내 몸이 먼저 죽는 것이 불효이다.”라 하고 칼을 빼 들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6~7 명을 베어 죽였으며, 마침내 어지러운 왜적의 칼날에 장렬하게 죽으니, 곧 정유년(1597) 9 월 25일이었다. 장례는 10월에 호산 해좌원에서 지냈다. 순절한 곳과는 고개 하나 사이로 가까웠다. 장사를 지내는 날에 기나긴 무지개가 종일토록 산소가 있는 영역을 걸쳐 흩어지지 않으니 보는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겼다. 공은 어려서부터 세상의 그릇됨을 보면 분하게 여겨 탄식하는 기질이 있어, 일찍이 옛 사기를 읽다가 그 절의가 탁월한 곳을 읽게 되면 반드시 무릎을 치며 우러를 따름이었다. 금산 싸움을 겪고부터는 항상 무기를 지녔으며, 매양 나라를 보위하여 어려운 때는 죽기를 맹세하는 뜻을 가졌으며, 또한 어머니를 사모하는 마음이 문득 나면 탄식을 하며 말하기를 “충신도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면 충성을 다하기가 어렵고, 효자로서 순국함이 효도를 다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다.”라고 공이 평시 말씀하셨으니, 이 같은 오늘의 일이 있어 마침내 충성을 다하는 죽음에 임해 어머니를 잊지 못했을 것이므로 어찌 거룩하다 아니 하겠는가? 첫째 부인께서는 광산이씨이니 판결사 변의 딸이었으나 생남생녀는 못하고 젊어서 돌아가셨고, 이어서 맞은 부인께서는 제주양씨로 통덕랑이신 달해의 딸이셨으니 부덕을 두루 갖추셨으며, 묘는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아들은 세 분이 있으셨으니 여홍은 동추요, 윤홍은 첨사이셨으며, 순홍은 주부이셨으니 다 양씨가 낳으셨다. 동추이신 여홍이 두 아들을 낳으셨으니 환은 생원이요, 택은 현감이니 첨사 윤홍의 뒤를 이었다. 주부이신 순홍이 다섯 아들을 낳으니 호 형 연 곤 심이요. 환이 아들 넷과 딸 넷을 낳으니 아들은 성시 성화 성언 성임이며, 첫째 딸은 증이판 이호인을 맞았으며, 둘째는 우후 남오를 맞았고, 셋째는 위장 나두위를 맞았으며, 넷째는 박사익을 맞았다. 택이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니 아들은 성익 성한이요. 딸은 병사 신명전과 양우귀를 각각 맞이하였다. 호 또한 두 아들을 낳으니 성렬 성요이고, 형이 네 아들을 낳으니 성량 성운 성표 성후이다. 성시는 조카인 이천으로 뒤를 이었고, 성화의 아들은 이웅 이건이며, 성언은 아들이 이회요. 성임은 아들이 이표 이헌 이천 이석 이신 이복 이성이 다. 이호인은 아들이 석창 석관이며, 통제사 남오는 아들이 헌과 병사 절이다. 성익은 아들이 이규 이구요. 성한은 형의 아들 이구로 뒤를 이었다. 신명전은 아들이 익념으로 북병사이고, 익항과 익돈은 진사이며 익황은 학행으로 주부를 하였다. 양우귀의 아들은 수중이 생원이고, 극중이 동추이며, 치중이다. 성렬은 아들이 이중 이현이요. 성도의 아들은 이극 이화이며, 성량의 아들은 이항이요. 성표의 아들은 이징이다. 나머지는 능히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공은 특별히 지극한 정성으로 추후에 포상과 포전으로 정려를 명 받음이 없지 않았으나, 이미 사우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으니 공의 후손들은 어찌 공의 훈업이 그 자취가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하리오? 장차 묘 앞에 돌을 세우고자 멀리 나에게 와서 비에 새길 글을 청하니, 돌아 보건데 거칠고 너저분한 글로 잘 들어내지 못 했지만, 깊이 감동하여 명(銘) 을 하노니, 국란에 임하여 의로서 저항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여덟 자의 은혜로운 포전은 백대토록 영광되게 빛날 것이며, 영령에게 장동사원에서 영원토록 향화를 받들 것이니, 호산은 우뚝하게 솟아있을 것이요. 이 명에는 돌결이 일지 않을 것이다. 고종황제께서 정해년(1887)에 특별히 병조참판을 증하고, 정려를 명한 사실이 원서에는 있으나 후에 찬한 글에는 누락된 곳이 있으므로 보태어 기록한다. 공께서 순절하신지 328년 갑자(1924) 12월 일 세움
贈吏曹參判行咸平縣監全公神道碑銘 有明朝鮮 贈通政大夫兵曹參議 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 衛都想府副總管行通訓大夫咸平 縣監羅州鎭管兵馬節制都尉全公神道碑銘竝序 德殷宋焕箕撰 首陽崔秉巽書 公諱夢星字應祥粤在 肅宗乙丑湖南章甫以公殉節呈籲道伯至徹 宸疏獲 蒙 貤典 教旨中特書臨亂抗義 爲 國捐生八字猗歟盛哉是可誝夫百世之下也己天安之全以百濟功臣歡 城君聶爲鼻祖至麗初諱洪述封寧 山君入我 朝有諱文軾參判諡文平寔公之十代祖也曾祖諱承文始居靈巖 祖諱倫縣監考邦弼僉知中樞府事 妣清州韓氏參奉千壽之女公生于 嘉靖辛酉容儀瑰偉容力絕倫事父母盡 誠志物之養備至僉樞公責勉以科名 則辭曰富貴而遠離庭闈不如貧賤而長侍膝下更以親意强之不己遂事武業 萬曆癸未登第聞喜之日獨入寢室歔 欷飲泣其弟怪而問之公曰男兒一受 國恩便當殉 國自此恐不得盡孝是以 立耳翌年赴防于北道兵使申公 砬與語而大器之因留幕下每事必問議焉初仕爲武兼宣傳官遷爲軍器寺主 簿當壬辰亂適遞職在鄉聞高公敬命 金公千鑑相继倡義乃與二弟訣曰吾以食祿之人不可一日在家若等奉老母 謹避之卽馳會高公麾下同赴錦山之 戰及其軍敗公顧謂傍人曰 主上在耳何必徒死遂抽矢鞭馬潰圍突出直馳 數十里下馬解甲以視之身被六創馬 尾爲賊鋒所斷矣觀察使李洸召公爲褊裨使與南平求禮兩倅及別將南應吉 防守于珍山照臨院及賊退公乃奔詣 於龍川 行朝卽拜宣傳官癸巳大駕還都除咸平縣監乙未遞歸丙申有薦公 以壬亂不避者特除利城縣監公以 親老乞免歸養丁酉倭寇再猘公慨然以為身旣許國義不可苟生仍謂季弟夢 台曰我不忍拜辭老親須善爲說辭 用寬慈念遂與仲弟夢辰前僉使柳長春生員徐希恕幼學朴文立金德洽柳希 春金德鸞徐鍵等諸人募得精銳分據 栗峙挾路設伏擊殺鈔賊以累百計於是衆推公爲將以柳長春朴文立爲左右 副據月出山以禦之會賊船數十艘泊 於銀積山後海巖浦上下山野剽掠益甚公引兵而進分作十部屯于鍮店洞 邀 擊於谷口少頃賊衆數百自浦上猝 至公乃登岸環陣又以老弱藏伏於崖後林木間隱映出沒以作疑兵挺身向前 殊死力戰士氣爭奮無不一當百賊大 衄而退朝賊復引大衆而至砲矢如雨公神色不變徐言于衆曰人固有一死寧 死於義不亦快乎況盡力以戰不無 得全之理爾勿畏怖遂倚大樹使一奴進先而射賊賊輒鞭應弦而倒更不敢逼 俄有一隊環山而來攻益急公弟夢辰中 丸而死左右亦多潰散公獨與柳長春植立不動冒刃發矢旣而矢窮弦絕乃勵 聲大呼曰爲 國死賊人臣之責塞矣 棄老母而身先死是不孝也逐提釰躍入賊陳六七級竟死於亂鋒中卽丁酉九 月二十五日也十月葬于豪山亥坐 之原距今殉節之所隔一嶺而近葬日之長虹橫跨瑩域竟日不散見者皆異之 公自少慷慨有氣節嘗讀古史見其節 義卓偉處則必激仰不己自經錦山之役常以戒具隨身每有衛國死難之志而 眷戀慈闈輒數曰忠臣有老親難於 盡忠孝子殉 國事難於終孝公之平日所言有如是焉而終得盡忠所事臨死一 語亦不忘親矣豈不偉哉初配光山 李氏判決事邊之女不育而天繼配濟州梁氏通德郎達海之女婦德甚備袝葬 公墓有三男汝弘同樞允弘使僉使順弘 主簿皆梁氏出也同樞生二男澳生員澤縣監繼僉使后主簿生五男浩□淵混 沉渙生四男四女聖時聖和聖彥聖任 女適 贈吏判李好仁次適虞侯南澳次適衛將羅斗緯次適朴思益澤生二男二 女聖翊聖翰女適兵使申命全次適 梁禹龜浩生二男聖烈聖道河生四男聖亮聖運聖標聖後聖時以從子爾天爲 后聖和男爾雄爾健聖彦男爾會聖任 男爾標爾憲爾天爾錫爾信爾復爾成李好仁男碩昌碩寬統制使南澳男獻兵 使截聖翊爾規爾矩聖翰以兄子爾 矩爲后申命全男益恬北兵使益恒益惇進士益幌學行主簿梁禹龜男守中生 員克中同樞致中聖烈男爾重爾賢聖 道男爾極爾華聖亮男爾恒聖標男爾徵餘不能盡錄鳴呼公之特被追褒誠至 矣當不無掉楔之典而旣有俎豆之享 今公雲仍何懼其泯沒哉將立石墓徑遠求余文顧非荒陋之辭所能闡揚而興 感者深遂爲之銘銘曰 臨亂抗義爲 國捐生八字恩褒百世耀榮英靈長院永享儡有吃豪山不泐斯銘 李太皇丁亥特 贈兵曹參判 命旌閭事在原序撰成之後而見漏故因而追識 焉 公之殉節後三百二十八年甲子十二月 日堅立
증이조참판행함평현감전공신도비명 유명조선 증통정대부병조참의 증가선대부병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상부부총관행통훈대부함평 현감나주진관병마절제도위전공신도비명병서 덕은송환기찬 수양최병손 공휘몽성자응상월재숙종을축호남장보이공순절정 유도백지철 신소획몽 이전 교지중특서임난항의 위국 연생팔자의여성재시가암부백세지하야기천안 지전이백제공신환성군섭위비조지려초휘홍술봉녕 산군입아조유휘문식참판시문평식공지십대조야증 조휘승문시거영암조휘륜현감고방필첨지중추부사 비청주한씨참봉천수지녀공생우 정신유용의괴위용 력절륜사부모진성지물지양비지첨추공책면이과명 칙사왈부귀이원리정위불여빈천이장시슬하경이친 의강지불기수사무업 만력계미등제문희지일독입침 실허희음읍기제괴이문지공왈남아일수 국은편당순 국자차공부득진효시이립이익년부방우북도병사신공 립여어이대기지인류막하매사필문의언초사위무겸선 전관천위군기사주부당임진난적체직재향문고공경명 김공천감상계창의내여이제결왈오이식록지인불가일 일재가야등봉노모근피지즉치회고공휘하동부금산지 전급기군패공고위방인왈 주상재이하필도사수추시편 마궤위돌출직치수십리하마해갑이시지신피육창마 미위적봉소단의관찰사이광소공위편비사여남평구례 양졸급별장남응길방수우진산조림원급적퇴공내분예 어룡천 행조즉배선전관계사 대가환도제함평현감을 미체귀병신유천공이임난불피자특제이성현감공이 친노걸면귀양정유왜구재제공개연이위신기허국의불 가구생잉위계제몽태왈아불인배사노친수선위열사 용관자념수여중제몽진전첨사유장춘생원서희서유학 박문립김덕흡류희춘김덕란서건등제인모득정예분거 률치협로설복격살초적이루백계어시중추공위장이류 장춘박문립위좌우부거월출산이어지회적선수십소박 어은적산후해암포상하산야표략익심공인병이진분작 십부둔우유점동장요격어곡구소경적중수백자포상졸 지공내등안환진우이로약장복어애후림목간은영출몰 이작의병정신향전수사력전사기쟁분무불일당백적대 뉵이퇴조적복인대중이지포시여우공신색불변서언우 중왈인고유일사녕사어의불역쾌호황진력이전불무 득전지리이물외포수의대수사일노진선이사적적첩편 응현이도경불감핍아유일대환산이래공익급공제몽진중 환이사좌우역다궤산공독여류장춘식립부동모인발시 기이시궁현절내려성대호왈위 국사적인신지책새의 기노모이신선사시불효야축제일약입적진육칠급경사 어란봉중즉정유구월이십오일야십월장우호산해좌 지원거금순절지소격일령이근장일지장홍횡과형역경 일불산견자개이지공자소강개유기절상독고사견기절 의탁위처칙필격앙불기자경금산지역상이계구수신매 유위국사난지지이권련자위첩수왈충신유노친난어 진충효자순 국사난어종효공지평일소언유여시언이종 득진충소사림사일어역불망친의기불위재초배광산 이씨판결사변지녀불육이천계배제주량씨통덕랑달해 지녀부덕심비부장공묘유삼남여홍동추윤홍사첨사순홍 주부개량씨출야동추생이남오생원택현감계첨사후주 부생오남호□연혼침환생사남사녀성시성화성언성임 녀적 증이판이호인차적우후남오차적위장라두위차적 박사익택생이남이녀성익성한녀적병사신명전차적 량우구호생이남성렬성도하생사남성량성운성표성후 성시이종자이천위후성화남이웅이건성언남이회성임 남이표이헌이천이석이신이복이성이호인남석창석관 통제사남오남헌병사절성익이규이구성한이형자이 구위후신명전남익념북병사익항익돈진사익황학행주 부량우구남수중생원극중동추치중성렬남이중이현성 도남이극이화성량남이항성표남이징여불능진록명호 공지특피추포성지의당불무도설지전이기유조두지향 금공운잉하구기민몰재장립석묘경원구여문고비황루 지사소능천양이흥감자심수위지명명왈 임난항의위 국연생팔자은포백세요영영영장원영향 뢰유흘호산불륵사명 이태황정해특 증병조참판 명정려사재원서찬성지후 이견루고인이추식언 공지순절후삼백이십팔년갑자십이월 일견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