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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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서호면

남양도호부사 박정 묘갈명

주  소
서호면 엄길리 130-14
건립연대
숭정기원후 54년 신유(1681년) *박정 : 1603~165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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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도호부사 박공 묘갈명(전액)

유명조선 통훈대부 행 남양도호부사 박공 묘갈명 병서
반남의 박씨는 우리나라의 대성으로서 가장 유명하고 현자도 많이 배출하였다.
처음 이름이 드러난 것은, 고려 말에 우문관직제학 휘, 상충(尙衷)에서부터이다.
바른 학문과 큰 절개로 포은 정몽주등 여러현자들과 병칭되었으며, 세상에서는
반남선생이라 칭하였다. 그의 아들 휘, 은(壻)은 태종을 섬겨 좌의정이 되면서
더욱 크게 드러났다. 다시 여러 세대 후에 사간인 휘, 소(紹)는 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으로 인해 사림들로부터 추앙받았다. 그의 아들인 대사헌 휘, 응복(應
福)은 세상 사람들이 높은 덕으로 추앙하였다. 다시 그의 아들인 휘, 동열(東說)은
관찰사로서 호는 남곽(南郭)인데, 일찍부터 재상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명망이
있었다. 비록 당시에 위험을 당해서 재능을 다 펼쳐내지는 못했으나 그의 현명함은
세상에 더욱 드러나 위대한 행실이 환하게 펼쳐졌다. 그는 고령 신벌(申埰) 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셋째아들이 바로 공이다. 공의 휘는 정(
渟)이고 자는 계연(季淵)이다. 음사로서 관직이 삼품에 이르렀고,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비록 명성과 지위로는 현달하지 못했으나 세상에서는 그 조상의
유풍을 지닌 현자라고 칭송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지녔는데,
문장을 지어서 자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 재주와 명성이 동년배들을
크게 압도했다. 우연히 정묘년(1627) 진사시를 보았는데 과연 1등이 되었으나
글자 하나를 잘못 써서 등수가 바뀌니 사론이 억울하다고 하였다. 계유년(1633)
에 의금부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익위사세마로 선발되어 위솔(衛
率)로 승진하였다. 병자년 호란 때 모부인을 모시고 호남으로 갔다가, 그 다음해에
공조좌랑으로 임명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기묘년(1639)에는 전주판관이 되었다.
공은 전란 후에는 공직을 사절하여 관계로 진출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태연하게 넓은
뜻을 가졌으나, 모부인이 연로해서 어찌할 수 없이 고을의 수령으로 나아간 것이다.
전주는 땅이 넓고 일감이 많은 풍요한 대도시로서 감사나 부윤은 그 큼직한 일들만
처리하고 그밖에 번다한 정치와 형벌에 관한 업무는 보좌관에게 맡겼다. 그래서 그
직책은 감당하기 어렵다고들 하였으나, 공은 상관의 명령을 잘 받들고 하리들을
조화와 믿음으로 잘 다스려서 일을 모두 잘 처리하였다. 한참 후에 친속으로 인해
사적으로 처리했다는 혐의를 받고 체임되었다. 얼마 후에 중씨인 대헌공이 영남으로
유배를 당하자 공은 현풍현감에 지원해서 가까운 곳으로 갔는데, 이는 모부인의
뜻을 받은 것이다. 그 후에 벼슬을 내놓고 돌아와서 다시 순창ㆍ고부 등의 군수가
되어 행정을 맡아보면서 자기를 절제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였으며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네 읍의 수령직을 역임하면서도 이러한 방도를 지켰으니, 다른 지방으로
이임할 때 백성들은 공을 더욱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기리기도 하였다. 계사년
(1653)에 모부인의 상을 당했다.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예제를 엄격히 지켰다.
탈상을 한 후에, 서울에 사는 아들의 병을 보고는 선공감 첨정이 되었다. 마침 조정에
들어갔는데, 효종이 여러 대신을 살펴보다가 공을 보고서는 “자네는 아무개의
아우가 아닌가? 모습이 어찌 그리 흡사한가” 하였다. 이는 아마도 대헌공이
임금에게 잘 알려져 있었고, 이전에 불행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들 말했다. 요직에 있던 제공들 또한 공의 재능을 애석히 여겨
추천해서 일을 담당시키려 하였다. 의논하여 남양부사로 발탁하였으나 부임하기
전에 병이 들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시남 유공에게 편지를 보내고 어린 손자를 부탁하였는데
정신이 조금도 착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부고가 전해지니 공을 아는 사대부는
모두 애통해하며 서로 조문하며 곡하고 ‘이 사람이 이것으로 끝나는구나’ 하였다.
공은 선조 36년 계묘년(1603)에 태어나서 효종 7년 병신년(1656)에 돌아가셨다. 3
월에 영암의 독현 남곽공의 묘 왼쪽에 장사지내고, 숙인 송씨를 합장하였다. 공은
모두 세 아내를 두었다.
초배는 바로 숙인 송씨로 지중추 일(馹)의 따님으로서 부녀자의 덕을 갖추었다.
아들 세휘(世彙)는 생원이고, 딸은 호조참판 이익(李翊)에게 출가했다. 계배는
김씨이고 현감 영후의 따님이다. 1녀가 있는데 김일광에게 출가했다. 다시 계배는
홍씨(洪氏)이고 직장 진해의 따님이다. 자식은 없었다. 세휘는 목사 윤형성의 딸과
결혼하여 1남을 두었다. 이름은 태초이다. 다시 태초가 2남을 두었으니 필해(弼
諧)와 필헌(弼憲)이다. 공은 천성적인 자질이 고매해서 평상시에는 장중하고 말이
없었으나, 시비를 변론하는 데는 확연하게 판단하였다. 남을 응접할 때 겉으로만
꾸미지 않았고, 착한 일에는 마음을 다 쏟았다.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도 불선한 점을
보면 바로 충고하여 거짓으로 사귀지는 않았다. 교제하는 벗 중에는 널리 알려진
사람이 많았는데 이것으로 더욱 우러르고 신뢰하였다. 어렸을 때에 아버지를 잃은
것을 애통히 여겨 모부인에게 효성을 다하여 모친이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해 드렸다. 두 형과 우애가 있어서, 벼슬에 나아갈 때만 아니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중년에는 서로 함께 산 주위에 집을 짓고 아침저녁의 여가 시간에는 시와
술로써 화합하여 형제의 즐거움을 다하였다. 족친이나 친구에 대해서도 마음을 쏟고
정의를 다하니 그들도 또한 친근하였다. 내가 성 서쪽 집으로 가서 공에게 문후할
때 공의 병은 이미 위독했다. 그러나 공의 말씀은 맑고 분명하여 오히려 경청하게
되었다. 나는 매번 공이 어진 재능을 가지고도 득의해서 세상에 현달하지 못했음을
한으로 여겼다. 이제 세상에 길이 남을 명(銘)를 써야 함에 차마 사양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나는 공과 친교를 가졌던 집안의 자손으로서 또 어찌 사양할 수 있을까?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너그러운 그 금도(襟度)와 우뚝하신 그 풍채로,
그의 행동 독실하시고 견식은 환히 밝았네.
다하지 못한 것은 그의 재주이고 사라지지 않은 것은 그의 명성이니,
후세에 이 명(銘)으로 징험하는데, 그 반드시 남곽공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숭정기원후 54년 신유년 여름 세움

南陽都護府使朴公墓碣銘
有明朝鮮通訓大夫行南陽都護府使朴公墓碣銘並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経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
監事金壽恒撰
族孫通德郞行泰陵參奉泰維書
輔國崇祿大夫兼兵曹判書兼知 経筵事行驪陽府院君閔維重篆
潘南之朴爲吾東大姓最顯而最多賢其始顯自麗朝直提學尙衷正學大節
與鄭圃隱諸賢
並稱稱爲潘南先生其子壻事 本朝爲左議政益大顯又數世而至司諫諱
紹以正直好學
重士林司諫之子曰大司憲諱應福世推爲長德生子諱東說觀察使號南郭
早負公輔望厄
于時未究厥施然其賢聲益彰徹大行南郭公聘高靈申公埰之女有子三人
其季卽公諱渟
字季淵以蔭仕歷官至三品年五十四以終名位雖未顯世皆稱其賢有祖先
遺風云公自少
志氣不群爲詞章往往驚人才名壓曹偶試丁卯進士果居首俄坐誤一字旋
易之士論稱屈
癸酉除義禁府都事不拜選補翊衛司洗馬序陞衛率丙子寇難奉母夫人奔
湖南明年授工
曹佐郞拜 命卽歸己卯爲全州判官公自亂後謝絶公車業不樂仕進悠然
有湖海之志以
母夫人年高遂湊勉焉全爲角沛大都地廣而事殷監司府尹苛其綱而其政
刑繁碎一委之
半刺素號難其職公承上御下以和與信事無不辦治久之以親嫌遞亡何仲
氏大憲公謫嶺
南公求爲玄風縣監以就近蓋承母夫人意也已棄歸又爲淳昌古阜郡守公
爲政務在約己
便民不栢取名所歷四邑持是道不變旣去愈見思或立石以頌之癸巳丁母
夫人憂老而能
持制制除視子疾于京拜繕工監僉正會次對入侍 孝廟目逆而謂侍臣曰
是非某弟耶何
其氣度甚似也蓋大憲公最受知 孝廟先已不幸人皆謂 聖意非偶然也當
路諸公亦惜
公才議推櫓以當一面擢授南陽府使未赴而屬疾卒前數日貽書市南兪公
託幼孫神思無
少錯訃至士大夫知公者咸齎咨相弔哭之以哀曰斯人也而止於斯耶公以
萬曆癸卯生卒
於崇禎丙申是年三月歸葬靈巖纛峴南郭公墓左以淑人宋氏蟄公凡三娶
元配卽宋淑人
知中樞馹之女甚有婦道生男世彙生員女適戶曹參判李翊次配金氏縣監
永後之女有一
女適金一光最後配洪氏直長進海之女不育生員娶牧使尹衡聖女生一男
泰初泰初二男
弼諧弼憲公天資儁邁平居莊重寡言至論辨事是非確乎不可撓待人不爲
毛皮於所善傾
心莫逆見有不善卽規責不面假所交多名流尤以是慕用焉自痛早孤致孝
母夫人苟可以
娛適者必力致之乃已與二兄友愛非游宦未嘗分異中歲相與築室邊山下
晨昏之暇觴詠
和翕以極塤儲之樂於族戚故舊任恤曲有情誼族戚故舊亦親就之記不簿
候公城西僑舍
時公疾已病而談論爽朗猶使人傾聽每念以公其賢而不得志公格以顯榮
於世以爲恨今
於不朽之託有不忍辭者況不簿公之通家子也其又何辭銘曰
寬然其度萄然其形 其行之篤厚其識之通明 未究者其才不泯者其名
後有徵乎斯
銘其必曰南郭公之典刑
崇禎紀元後五十四秊辛酉夏立

남양도호부사박공묘갈명
유명조선통훈대부행남양도호부사박공묘갈명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령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김수항찬
족손통덕랑행태릉참봉태유서
보국숭록대부겸병조판서겸지 경연사행
여양부원군민유중전
반남지박위오동대성최현이최다현기시현자려조직제학상충정학대절여정포은제현
병칭칭위반남선생기자서사 본조위좌의정익대현우수세이지사간휘소이정직호학
중사임사간지자왈대사헌휘응복세추위장덕생자휘동열관찰사호남곽조부공보망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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