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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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시종면

통훈대부 문극효 묘비

주  소
시종면 신연리 산 91-1
건립연대
성상 41년 갑진 8월(1904년) *문극효 : 1745~179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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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 행(行) 함경도 도사(都事) 문극효의 묘

공의 휘는 극효로 자는 미중(美仲)이고, 풍와(楓窩)가 자호이다. 문씨는 남평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신라 삼한벽상공신 무성공을 비조로 삼는데, 그 실제
사적이 기이하다. 충선공 휘 익점은 고려말의 명신으로 목면을 들여와 옷을
만드는 데 공을 세웠다.
이단을 물리치고 바름을 숭상하는데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또한
탁월한 공이 있었다. 우리 태종 대왕 치세에 특명으로 녹훈되고 증직받았으니
강성군에 봉해졌다. 명회(明會)가 수문장이 되었을 때, 철권에 이름을 올렸으니
그야말로 공의 6대조이다. 고조는 휘가 계륜(繼綸)으로 선교랑을 지냈고,
증조부는 휘가 국보(國寶)로 전력부위(展力副尉)를 지냈다. 조부 복형은 호가
청하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직강을 지냈으며, 삼례찰방으로 나갔을 때 정사를
깨끗하고 공평히 하였고, 안으로는 행실이 훌륭하여 효성으로 양친을 봉양하여
빙어가 잡히는 감응도 있었다.
아버지는 휘가 태채로 통덕랑을 지냈는데 생활이 궁핍하여도 선량한 성품을
지녔다. 어머니 진주정씨는 감찰 동한의 따님인데 행실이 장엄하여 규범이
있었고, 영조 을축년 11월 17일에 금성 연소리(鷰巢里) 집에서 공을 출산하였다.
공은 자질이 영민하고 문예를 일찍 성취되어 보는 사람마다 찬사를 보냈다.
나이 13세에 친상을 당하자 상을 치르는 절조가 마치 노련한 어른 같았다. 상이
끝나자 더욱 학문에 힘써서 오로지 경전만을 붙잡고 공부하여 두 차례 향시에
참여하였다.
계묘년에는 을과 제1인으로 뽑혔으나 어사화를 쓰기 전에 사양하고 조창하니, 위에서
특별히 가상히 생각하여 표창하려 하였다. 갑진년에는 성균관 학유가 되었고 …… 지극히
겉으로 드러나서 백장(伯獎)이 허여하였다. 무신년에 전적(典籍)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직강이 되었다. 기유년에 함경도 도사로 나갔는데, 천 리 먼 길을 부임하여 진충봉공
(盡忠奉公)하고 성실하고 근면하며 주밀하게 일처리를 하였으니, 관비를 쓰지 않고도
조금도 그 직분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임기 말을 채우지 못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신해년 정월 7일에 졸하니 향년 47세였고, 장사는 소거산 남쪽 침리에 지냈다. 배위는
숙인 창녕 조씨로 좌랑인 윤주의 따님인데 효성스럽고 공순하며 검소하였으니 능히
부덕이 있었다. 계해년 3월 27일에 태어나 무오년 8월 26일에 졸하니 묘는 연방 십자등에
오좌(午坐)로 자리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없었으므로 공의 동생 경효(敬孝)의
아들인 영완(榮緩)으로 후사를 삼았는데 통덕랑을 지냈다. 손자는 영한의 장남 명한, 차남
응한이 있는데 출계(出系)되었다. 딸은 나수영(羅壽永)에게 시집갔다.
명한의 아들인 치후(致垕), 치수(致秀)는 출계되어 응한의 가계로 출계되었다. 현손
이하는 다 적지 않는다. 아아! …… 반드시 강성군(江城君)의 유택이 길이 세상에 속임이
없어야 하니, 그 후손이 훌륭한 것은 …… 그러나 공의 명민한 재질은 충직한 뜻이
있었으니 세상에 등용된 것이 당연하나 지위가 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니 또한 그 운수가
가로막힘도 정말이지 운명일 뿐인저! 후손들이 장차 묘에 묘표를 세우고자 하여 나에게 그
음기를 작성해줄 것을 청하므로 그 기록을 뽑아 간략하게 얼개를 서술한 것이 이와 같다.
아! 공의 아름다운 행적이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되었건만 자주 화재를 입어 산일된 것이
많으니 오직 기일잠(幾一箴)만이 있고 다른 것은 사라졌지만 또한 공의 배움은 거의 옛
군자와 비슷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상(聖上) 재위 41년 갑진 8월, 종사랑 의금부도사 은진(恩津) 송병순이 짓다.
현손(玄孫) 태진 유진
5대손 제흠 씀
제섭 제선 제승 제헌 제철 제흠 제순 제□ 제영

通訓大夫行咸鏡道都事文公極孝之墓
公諱極孝字美仲楓窩其自號也文氏系出南平以新羅三韓壁上功臣武成公爲鼻祖
實蹟甚有奇偉至忠宣
公諱益漸爲麗末名臣木綿東來衣被億北盖其功也闢異崇正忘身殉國又有卓偉我
太宗朝特命錄勳贈
職封江城君有諱明會以守門將立慬於龍蛇之亂名著鐵券寔公六世祖也高祖諱繼
綸宣敎郎曾祖諱國寶
展力副尉祖諱復亨號淸河登第以直講出補參禮察訪政治淸平內行純薦孝養其親
致氷鯉之感考諱太采
通德郞悃愊樂善妣晋州鄭氏監察東翰之女雍穆有壼範以 英廟乙丑十一月十六日
生公于錦城鷰巢里
第天姿頴敏文藝夙就見者皆以謝家鳳毛期詡年十三丁外艱戚昜之節便如老成服
闋益力學專治經二累
叅鄕□解癸卯式擢乙科第一人獻誠幾箴辭義條暢自 上特賜褒嘉甲辰拜成均館學
諭乙□除慶□督□
公廉淸直極被府伯獎許戊申除典籍未幾移直講己酉出爲咸鏡道都事千里赴任盡
忠奉公謹愼周密不以
官卑而少懈其職竟未展蘊抱退歸鄕里以 正廟辛亥正月七日卒享年四十七葬于所
居山南枕里之原配
淑人昌寧曺氏佐郞潤周之女孝順勤儉克有婦德生於癸亥三月二十七日卒於戊午
八月二十六日墓在淵
坊十字嶝午坐原无育以弟敬孝男榮緩爲后通德郞孫男長鳴翰次應翰出后女適羅
壽永鳴翰男致垕致秀
出系應翰玄孫以下不盡錄嗚呼□表生民必以江城君遺澤爲永世不諼則於其後承
之賢孰□愛而緽□也
哉然以公明敏之才忠直之志宜其需世敷用而位不稱德且閼其壽固命也歟後孫將
竪表于墓要余記其陰
遂撮其狀畧叙梗槩如此噫公之嘉言徽蹟可傳於世者累經災沴散亡遺佚惟誠
幾一箴尙在此雖寂寥亦可見公之所學庶無愧於古之君子云
聖上四十一年甲辰八月 日 從仕郎義禁府都事恩津宋秉珣撰
玄孫 泰鎭 有鎭
五代孫 濟欽書
濟燮 濟善 濟勝 濟憲 濟哲 濟欽 濟順 濟□ 濟英

통훈대부행함경도도사문공극효지묘
공휘극효자미중풍와기자호야문씨계출남평이신라삼한벽상공신무성공위비조
실적심유기위지충선
공휘익점위려말명신목면동래의피억북개기공야벽이숭정망신순국우유탁위아
태종조특명록훈증
직봉강성군유휘명회이수문장립근어용사지란명저철권식공육세조야고조휘계
륜선교랑증조휘국보
전력부위조휘복형호청하등제이직강출보참례찰방정치청평내행순천효양기친
치빙리지감고휘태채
통덕낭곤핍락선비진주정씨감찰동한지녀옹목유곤범이 영묘을축십일월십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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