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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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군서면

경은 박기정 묘갈명

주  소
군서면 마산리 산 63-1
건립연대
저옹집서 륵(윤달) (무진 1928년 2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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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은 박공 묘갈명(전액)

내가《동한사(東漢史)》를 읽다가 주섭(周燮), 강현(姜胘), 서지(徐穉), 신도반(
申屠蟠)이 어쩌다 동강(東岡)을 지키기도 하고, 해변에 은거하기도 하며 몸소
농사지으며 먹고 살기도 하고, 나무숲을 집으로 삼기도 하며, 끝내 당고(黨錮)
의 화를 면했다는 사실을 보았다. 100대가 지난 뒤에라도 오히려 그 맑은 기풍을
떨치고, 그 높은 표시가 유행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며 법을 바꾸고
숙연히 경건함을 일으키게 한다. 경은(耕隱) 박공 같은 사람이 어찌 그런 사람이
아니겠는가?
공은 함양 사람으로 휘가 기정(箕精), 자는 자범(子範)으로 고려 때 예부상서를
지낸 휘 선(善)의 후예이다. 대대로 재상을 세습하였다. 5대를 전하여 휘 신유(臣
蕤) 공은 도적을 토벌하여 응천(凝川)을 식읍으로 받았다. 증조부는 휘가 언(彦)
으로 우리 왕조에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연좌되어 만호로 외보되었다. 조부는
휘가 성건(成乾)으로 호가 오한(五恨)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장수현감을 지냈고,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영암에 기거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그 덕과
의로움을 추모하여 그를 제사 지냈다. 부친의 휘는 율(栗)로 관직은 참봉에
이르렀다. 그 부인은 송씨로 본관은 홍주이다. 공은 홍치 임자년에 태어났다.
천부적인 바탕이 훌륭하여 비상하였고, 부모의 수발을 드는 겨를에 일을 보았다.
점점 자라서 문예가 크게 증진되어 당시의 노숙한 이들이 모두 추중(推重)하였다.
중종 때 천거되어 숭덕전(崇德殿) 참봉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말했다. “
학문이 우수하지 않은데 녹이 이득이 되게 하는 것은 옛사람도 하지 않는 일인데,
하물며 나이도 적고 식견도 없이 시속에 힘쓰는 이에게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원임(原任)의 권세가 사림을 도륙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
(己卯士禍)라고 하는 것이다. 공은 홀로 외물에 초연하여 금망(禁網)에 걸리지
않았으니 기미를 보는 밝음을 알 수 있다. 이때로부터 더욱 다시 의도하여 남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산림처럼 행동하였다가 우연히 노닐며 자득하였다가, 태어난
지 63년만인 갑인년 2월 20일에 졸하였다.
《시경》에서 말한 ‘마침을 잘 하는 것[朗令終]’이 이것을 말함이로다!
동군의 오산(蜈山)을 점쳐 계좌에 안치하였고, 배위는 진주 강씨를 합장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장남은 충세(忠世)로 직장을 지냈고, 차남은 개세(凱世)이고, 손자 경인(敬仁)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증손자 남영(男英)이 교수묘도(敎授墓道)에 오랫동안 사적비가
없는 것을 세웠고, 후손인 원양이 나에게 그 명을 청하였다. 정말이지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선조인 문곡 선생과 공의 종제인 삼도(三島)의 수옹(壽翁) 선생과 아계(雅契)
로 대대로 그 집안에 대해 들었으며, 또 공의 고결함이 후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므로
마침내 사양하지 않고 명을 지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나아가면 나는 물러나니 우매함으로 지혜를 바꾸어 어찌 세상에 뜻을 두랴?
만리 밖의 큰 백성들이 유독 두 날개를 말하는데 어찌 근심이 지극하겠는가?
온갖 꽃이 피었거니 외로운 소나무가 다 푸른구나.
어찌 그 풍모를 사모하여 마음으로 취하지 않으랴?
무진년 윤달 5일, 통정대부 전 비서원승(秘書院丞) 안동 김영한(金寗漢)이 짓다.
전주 최병두(崔秉斗) 삼가 씀
11대손 한순(漢純)
4월 일 세움

耕隱朴公墓碣銘
余讀東漢史見周燮姜胘徐穉申屠蟠或守東岡或隱海濱或躬稼而
食或因樹而屋卒免黨錮之禍百世之下尙挹其淸風行其高標使人
洒然而易憲肅然而起敬若耕隱朴公者豈非其倫耶公咸陽人也諱
箕精字子範冑于高麗禮部尙書諱善簪組相襲五傳諱臣蕤以討賊
勛食米凝川曾祖諱彦八 本朝以工判坐事外補萬戶祖諱成乾號
五恨登文科監長水縣仍投韍而南眞居靈巖邦人慕其德義爼豆之
考諱栗官叅奉妣宋氏籍洪州公以 弘治壬子生天資俊爽不羣定
省之暇惟呻佔是事稍長文藝大進當時老宿咸推重焉當 中廟之
世薦授崇德殿叅奉不就而曰學不優而趍祿利古人所不取况年少
不識時務者乎未幾羣壬用事斬伐士林此所謂己卯禍也而公獨超
然物表不罹禁網見幾之明盖可想也自是益復韜晦不肯隨人桔橰
山林臯壤優游自得距其生六十三年甲寅二月二十日卒風人所稱
者朗令終者此之謂歟卜同郡蜈山癸坐而安厝配晋州姜氏祔焉有
二男長忠世直長次凱世後男敬仁僉中樞曾孫男英建敎授墓道久
无蹟刻後孫原陽丏余語誠不敢當者然昔我先祖文谷先生與公從
父弟三島壽翁有雅契稔聞其家世而且公之高蹈遠引足以垂範於
後故遂不固辭撮而爲銘銘曰
人進我退以愚易智無奈襄世之志歟萬里鴻㝠獨擧雙翅何患繒徼
之至歟百卉隕黃孤松含翠豈不慕風儀而心醉歟
著雍執徐扐之五日通政大夫前秘書院丞安東金寗漢撰
全州崔秉斗敬書
十一代孫 漢純
四月 日 竪

경은박공묘갈명
여독동한사견주섭강현서치신도반혹수동강혹은해빈혹궁가이
식혹인수이옥졸면당고지화백세지하상읍기청풍행기고표사인
쇄연이역헌숙연이기경약경은박공자개비기륜야공함양인야휘
기정자자범주우고려예부상서휘선잠조상습오전휘신유이토적
훈식미응천증조휘언팔 본조이공판좌사외보만호조휘성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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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대손 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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