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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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군서면

선무원종공신 하응문 묘비

주  소
군서면 마산리 산 69-1
건립연대
숭정후 5주 갑인 양생월(1914년 11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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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국 선무원종공신 행 오위도총부 부장 하응문의 묘

배위(配位) 단인 밀양박씨, 부좌(祔左, 왼쪽 합장)
선무원종공신 행 오위도총부 부장 하공 묘갈명
우후(虞侯) 하권만(河權萬)은 전부터 전아한 징험이 있었다. 그 선조인 참판공(叅
判公)의 비갈은 이미 끝났는데 또 청하여 오기를 ‘선조의 자부장(子部將)이 충효가
모두 탁월하니 원하옵건대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삼가 그 문서를 살펴보니, 공의 휘는 응문(應文)이다. 진양(晋陽)의 하씨는 고려의
사직(司直)을 지낸 진(珍)을 같은 조상으로 한다.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결(潔)
은 국초의 명신이며, 공조참판(工曹叅判) 금(襟),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를 지낸 순(淳), 진사(進士) 경연(景沇)이 모두 공의 고조 이상의 조상들이다.
증조부는 장사랑(將仕郎) 기남(起南)이고, 조부는 통덕랑(通德郞) 관(灌)이며, 부친
홍수(弘秀)는 문과에 급제하였고, 행 순안현령(順安縣令)을 역임하였으며, 후에
참판에 증직 되었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의표(儀表)가 남다른 구석이 있어서,
닭무리 가운데 학이 서 있는 것과 같았다. 천품(天禀)이 효를 지극히 하였으므로
비록 채소나 과일 같은 하찮은 것이라도 부모님보다 먼저 들지 않았고, 혹시
부모님이 내려주시는 것이 있으면 먹지 않고 보관하였다가 다 떨어지면 부모님께
내어드렸으며, 부모님의 거처가 춥고 따뜻한 정도를 살필 때는 비록 집안에서
부리는 사람이 있더라도 맡기지 않고 직접 하였다. 형제간에 매우 화합하여 비록
시속을 따라 별도로 사는 것을 면치는 못했어도, 부인들이 형제가 말하는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다. 친척이나 외척, 오래된 친구와도 서로 사귐에 신의를 얻었다.
남보다 힘이 셌고, 틈나는 대로 병서를 읽었는데, 아마 일찍 변방의 문제에 대해
알았기 때문인 듯하다. 전장에 나아가 시체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충용(忠勇)
스러운 행동을 평소에도 일삼았다. 전쟁이 나자 동지들을 모아서 어가를 따라
의주까지 호종하고자 하였으나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 호남, 호서의 사이에서
적을 무찔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왜적의 수가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등창이 나서 집에 머무르게 되자 뜻을 펼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다.
공훈을 인정하여 공신으로 봉하고자 하는 녹권이 이르렀으나 누차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조(宣祖)가 승하하자 단을 쌓고 망곡(望哭)하였는데 항상 미리 방비하지 못하여 군부가
몽진하게 하는데 이른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광해군 조정의 어지러움을 보고 다시 조정에
나아갈 뜻을 품지 않았다.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나니, 해남 월암 묘좌에 장례를 지냈으니,
부친의 선영을 따른 것이다. 부인은 밀양 박씨 화주(和珠)의 따님으로 합장하였다. 아들
하나가 있으니 지재처사(志齋處士) 손(遜)이고, 손자는 백소(白素)인데 4대 째부터 자손이
번성하였다.
공은 평소에 군주의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을 품고 누차 훌륭한 공을 세우고자 하였으니,
그 뜻은 요사스러운 기운을 쓸어버려 나라를 바로잡아 회복하게 하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병으로 끝내 일을 이루지 못하자, 항상 개탄하였다.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지하에서 공을 일으켜 저승의 거둠을 있게 하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을 볼 때는 그 공을 따지지 않고 그 의리를 논한다.
내가 일찍이 도적 100명을 욕하고 살인한 왜인을 죽였는데도 죽음의 위기를 피하지
못했다.
하물며 공은 호남과 호서에서 왜군을 죽이고 사로잡기를 수가 없이 하였으니, 과연 그의
의기이다.
공의 혼백은 충성스럽고 굳건하여 끝내 하늘에서도 죽지 않았으니,
만약 우리 동방을 묵묵히 도와줄 수 있다면 종사를 평안케 할텐데!
숭정 후 5주 갑인 10월, 생명(生明)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 지음
시문장(時門長) 11대손 태주
12대손 법부주사(法部主事) 권용 창립
12대손 권규 삼가 씀
전 주사(主事) 권황 전 의관(議官) 권엽
13대 종손 유욱

有名朝鮮國 宣武原從功臣行五衛都摠府部將河公應文之墓
配端人密陽朴氏 祔左
宣武原從功臣行五衛都摠府部將河公墓碣銘
河虞侯權萬夙昔有雅徵其宣祖叅判公碣旣斷手又起請曰先祖有子部將
忠孝幷著願卒惠焉謹按其狀公諱應文晋陽之河同祖高麗司直珍大司諫
潔爲 國初名臣工曹叅判襟僉中樞淳進士景沇寔公高祖以上曾祖將仕
郎起南祖通德郞灌考弘秀文科行順安縣令 贈叅判公幼有殊表如鶴立
鷄群天禀至孝雖蔬果之微不先父母食或有所賜藏而待乏在視寒煖雖家
人不委兄弟湛翕雖未免隨俗別居而婦人言不能間之族戚故舊信義交孚
有過人膂力暇日讀兵書盖早知邊釁焉馬革褁尸忠勇爲素抱龍蛇之變收
率同志將扈 駕龍灣道阻未及討賊於兩湖之閒斬獲無等疽發背家居慨
然於志不得伸勳券之及屢辭而不獲 宣廟賓天築壇望哭常恨陰雨無備
致使君父蒙塵及見昏朝政亂不復作進取意享年七十二而終葬海南之月
嵒卯坐從父兆也夫人密陽朴氏和珠女合封一男志齋處士遜孫白素四世
而始蕃衍云公素抱敵愾屢立奇功而廼其志則廓掃妖氛以致匡復而病不
能卒事常所慨然今也或是之無安得起公於九原使有桑楡之收耶銘曰
觀人不計其功而論其義余甞罵賊百人殺人倭而死死猶不避况公兩湖之
閒斬獲無等如其義如其義公忠魂毅魄終天不死若可以黙佑大東奠安宗

崇禎后五周甲寅陽生月生明幸州奇宇萬撰
時門長 十一代孫泰疇
十二代孫法部主事權庸剏立
十二代孫權奎謹書
前主事權煌 前議官權燁
十三代宗孫有煜

유명조선국 선무원종공신행오위도총부부장하공응문지묘
배단인밀양박씨 부좌
선무원종공신행오위도총부부장하공묘갈명
하우후권만숙석유아징기선조참판공갈기단수우기청왈선조유자부장
충효병저원졸혜언근안기상공휘응문진양지하동조고려사직진대사간
결위 국초명신공조참판금첨중추순진사경연식공고조이상증조장사
랑기남조통덕랑관고홍수문과행순안현령 증참판공유유수표여학립
계군천품지효수소과지미불선부모식혹유소사장이대핍재시한난수가
인불위형제담흡수미면수속별거이부인언불능간지족척고구신의교부
유과인려력가일독병서개조지변흔언마혁척시충용위소포룡사지변수
솔동지장호 가룡만도조미급토적어양호지한참획무등저발배가거개
연어지부득신훈권지급누사이불획 선묘빈천축단망곡상한음우무비
치사군부몽진급견혼조정란불복작진취의향년칠십이이종장해남지월
암묘좌종부조야부인밀양박씨화주녀합봉일남지재처사손손백소사세
이시번연운공소포적개누립기공이내기지칙곽소요분이치광복이병불
능졸사상소개연금야혹시지무안득기공어구원사유상유지수야명왈
관인불계기공이론기의여상매적백인살인왜이사사유불피황공양호지
한참획무등여기의여기의공충혼의백종천불사약가이묵우대동전안종

숭정후오주갑인양생월생명행주기우만찬
시문장 십일대손태주
십이대손법부주사권용창립
십이대손권규근서
전주사권황 전의관권엽
십삼대종손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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