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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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서호면

성균관생원 김윤신 묘비

주  소
서호면 청용리 산 91-7
건립연대
갑자 3월(1924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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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생원 밀양김씨 김윤신의 묘

배위(配位) 의인(宜人) 해남윤씨 왼쪽 합장
성균관 생원 김공 묘표
평상시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록하여 빗면에 새겨서 길에 세운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은산(隱山) 남쪽 교봉(轎峯) 기슭에 밀양을 본관으로 하는 가문의 장산(葬山)이 있고, 그
오른편 경계에 높이 4척 되는 것은 고(故)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 김공(金公) 윤신(潤
身)의 묘이다. 배위는 의인(宜人) 해남윤씨로 그 부친은 형오(亨五)이다. 후손인 동현(東鉉)
이 일찍이 비석을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되었고 빗면이 퇴락하여 자획을 분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여러 친족이 함께 말하기를 “이 비석을 바꾸지 않으면 선조의 사적은 징험할 것이
없게 되니, 바꿔 세우는 일이 정말 중요한 일이니 늦출 수 없다”고 하자, 다들 “옳다”고
하고, 돌을 캐어 반을 갈고, 덕호(德浩), 수호(守浩)가 서로 나에게 비문을 지어 기려달라고
하니, 결국 그 얼개를 뽑아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공은 관향이 밀양이니, 휘가 승조(承祖)가 되는 분이 고려 조에서 벼슬하여 밀양에
봉군되었으므로, 그 자손이 그것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 후대에 관직과 문벌을 세습하게
됨에 충효(忠孝)를 서로 이어서 끝내 동방의 큰 문중이 되었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범상치 않은 자질을 지녔는데, 품성이 전아(典雅)하고 재주가 총명하고 슬기로워
사람들의 중망을 받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상례를 당했을 때, 슬픔이 부족하고 의식에
남음이 있는 것이 의식에 부족함이 있고, 슬픔이 넘치는 것만 못하고, 제례를 지낼 때는
성심이 부족하고, 의식에 남음이 있는 것이 의식에 부족함이 있고 성심이 넘치는 것만
못하다. 이 말을 여러 번 완미하면 우리 선생님(공자)의 은미한 뜻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정말이지 스스로 마음에 터득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마음을 미덥게 하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 논의를 확실하게 한다면 충분히 학문하는 방향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어버이를 기쁘게 하고자 과거 공부를 위주로 공부하였고, 향시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경우가 많아서 이름이 연방(蓮榜)에 올랐다. 성균관에 있을 때는 기운이 굳세고 의(義)가
강직하여, 아첨하는 무리를 탄식하여 돌아와 고산(故山)에 은거하며 시를 지으며 스스로
즐겼고, 후학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는 것으로 여생을 삼았다. 숨어 살면서도 원망하지
않았고, 자기에게서 미루어 남에게 미치도록 하여 부지런한데 힘썼으니, 죽은 뒤에야
끝난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김씨 가문의 기록이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공의
훌륭한 언행이 불씨에 훼손되고 문헌으로 징험할 수 없으니 정말이지 애석하다.
휘 진(軫) 공은 관직이 참봉이었고, 휘 광후(光厚) 공은 판관이었으며, 휘 견(堅) 공은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고, 관직은 병조판서(兵曹叅判)에 이르렀으며,
시호가 근무(勤武)이다. 휘 철(鐵), 휘 곽(钁) 공은 만호로 근무공의 아들이다. 휘 방발(放
發) 공은 첨정(僉正), 휘 경발(景發) 공은 관직이 사복시 승이었다. 갑자년 이괄의 난 때
높은 공훈을 세워 녹권 되었다. 휘 준발(俊發) 공, 맹산현감(孟山縣監)을 지낸 휘 성발(聲
發) 공은 만호공의 자제이다. 휘 수발(粹發) 공도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지냈으니 역시
공의 자제이거나 손자이다. 아아, 노희 후손들은 어진 사람을 야기한다는 것을 알아 이
사람들이 어려서 다치는 일이 없게 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할 일이다. 가문을 이은 대표인
원현(元鉉)의 말에 따라 홍현(弘鉉), 기호(起浩), 병채(炳采) 등이 힘을 합쳐 공을 이루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시 짓고 의례 봉행하기를 업으로 하여 일찍부터 기대받게 되었네.
또한 과거 공부에 정순하여 이름이 연방에 붙었고,
기운은 화락하고 말은 따뜻하였으니, 공부하는 동료들이 다 탄복하였네.
조상을 이어 후대에 물려주었으니 집안의 덕을 무너뜨리지 않았더라.
길이 노닐 적에 유유자적하였네.
작은 봉우리 길 곁에 엄연한 그 돌,
감히 비명을 새겨 오래도록 기리리라.
월성 최기성 지음
후손 병추 씀
갑자 3월 일 세움

成均館生員密陽金公諱潤身之墓
配宜人海南尹氏 祔左
成均館生員金公墓表
蒐其常時嘉行實蹟鐫于石面庸表隧途其 耒古矣隱山之陽轎峯之麓有密陽
氏世葬山其
右邊封高四尺者故成均館生員金公諱潤身之藏也配宜人海南尹氏考亨五
后孫東鉉曾
竪短碣歲月滋久石面頹圮字劃難辨諸族合辭曰此石若不替立使先祖偉蹟
無所者徵替
立之事誠可急而不可緩也咸曰可伐石磨半德浩守浩相翊徽表於余遂撮其
大槩而叙之
曰公密陽人有諱承祖仕 麗朝以勳封君密陽子孫仍以爲籍厥後世襲官閥
忠孝相系遂
爲東方巨族公生有異質性度典雅才哭聰慧爲人所推重冒曰喪如其哀不足
而祀有餘不
若祀不足而哀有餘祭如其誠不足而祀有餘不若祀不足而誠有餘玩此數語
可謂得吾夫
子之微旨也苟非自得於心焉能信心說出如是其的然斯論足可爲祀學之指
南矣欲爲悅
親乃業于公車多有鄕觧之高點題名蓮榜在泮時氣勁義直爲脩類吅憚歸臥
故山詩祀自
娛招諭后學以終餘年頊無怨尤所謂律己及人俛焉孶孶斃而後己者非耶噫
金氏乘牒屢
經兵燹公之嘉言善行八於煨燼文獻無徵誠可慨也己諱軫官叅奉諱光厚判
官諱堅壬丁
之役 扈聖功臣官兵曹叅判諡勤武諱鐵諱钁万戶勤武公之子諱放發僉正
諱景發官司
僕丞甲子适變立巍勳有錄券諱俊發諱聲發監孟山縣万戶公之子諱粹發監
玉果縣並公
之子若孫曾也嗟爾后人知其惹仁人之藏而勿以耕犂見傷也是役也承門丈
元鉉之敎弘
鉉起浩炳采協力竣功銘曰
業邃詩祀早播令望且精公車名載蓮榜氣和言溫脩類咸服承先貽後不墜家
德永矢考槃
悠然自適轎峯之阡旁然其石敢構表銘庸壽千億
月城 崔基性 撰
后孫 炳秋 書
甲子三月 日竪

성균관생원밀양김공휘윤신지묘
배의인해남윤씨 부좌
성균관생원김공묘표
수기상시가행실적전우석면용표수도기 뢰고의은산지양교봉지록유밀양
씨세장산기
우변봉고사척자고성균관생원김공휘윤신지장야배의인해남윤씨고형오
후손동현증
수단갈세월자구석면퇴비자획난변제족합사왈차석약불체립사선조위적
무소자징체
립지사성가급이불가완야함왈가벌석마반덕호수호상익휘표어여수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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