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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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서호면

성균생원 박세휘 묘갈

주  소
서호면 엄길리 130-14
건립연대
무인 가을(1878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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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 성균생원 반남박씨 박세휘 자(字) 도장(道長)의 묘

유인 남원윤씨 왼쪽 합장
숭정 갑오년, 6촌 형님인 도장(道長)이 한성에서 병에 걸리자 숙부(叔父)이신
부사공(府使公)께서 부안(扶安) 새집에서 오셔서 그를 구완하셨으나 오래도록
효험이 없었다. 병신년 봄이 되어 부사공께서도 병이 심해지시며 끝내 졸하였다.
도장(道長)이 그 조부인 참판공(叅判公)의 영암 선영으로 부사공의 관을 모시고
가 장례를 치렀으니 병을 핑계 삼아 예를 폐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거상(去喪)
하자 호서(湖西)의 탕천(湯泉)에 와서 목욕하고 이어 다시 한성에 와 백부(伯父)인
첨추공(僉樞公)에게 문안하였다. 기해년 1월 13일, 끝내 도장 공이 두창(痘瘡)에
걸려 세상을 뜨니 나이가 겨우 35세였다. 도장의 아들인 태초(泰初)는 이때 아직
성동(成童)[舞象]이 아니었으나, 또 상을 당하여 부사공의 선영에 부친을 장례
지내게 되었다. 친구들이 전송하러 와서 곡하다 목소리까지 나오지 않았으니 천도
(天道)의 한이 됨이 지극하였다.
그 뒤 19년이 지난 정사년에 태초(泰初)가 드디어 성가(成家)하여 계조모 홍씨와
계모 윤씨를 봉양하여 평안하게 되었다. 임씨(林氏) 부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필해(弼諧)와 필헌(弼憲)이다. 이에 묘표(墓表)의 문장을 지어줄 것을
나에게 부탁하였는데 또 천 리밖에서 온 편지가 다시 이르렀다. 아아! 이것이 어찌
내게 눈물 흘리고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장의 휘는 세휘(世彙)로 나와 함께 의정공(議政公)의 증손이니, 반남(潘南)
선조의 10세손이 된다. 어렸을 때는 따로 살다가, 무자년 가을에 남곽(南郭)
의 옛집에서 만났고 ,이때 함께 진사시에 급제하고 나서는 함께 어울려 지냈다.
조용히 그 사람됨을 보자면, 겉모습은 한아(閒雅)하고 말하는 기운은 고요하여,
시속의 사람들처럼 거짓으로 꾸미는 습관이 전혀 없어서 정말이지 내 마음에
간직하게 되었다. 장원서(掌苑署) 뒷마을에 기거할 때 도장이 자주 찾아왔고, 나도
여러 번 찾았다.
평생의 마음가짐과 일을 말하자면 가정의 가르침과 법도에서 나온 것이 많았으며,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또한 모두 절실하고 중요한 것을 기준에 두고 한
것이었다.
그 지식과 범위는 남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이익을 경영(經營)하는 일이나, 성색(聲色)의
기호(嗜好)에 대한 것 일체는 대체로 담담하였다. 지금 그의 글을 근거로 말하자면, 도장은
집에 있을 때는 방을 정결히 치우고, 반드시 서책을 가까이하여 마음과 정신을 함양하는
데 힘썼다. 항상 돌아가신 친모 송씨(宋氏)를 뒤따르지 못함을 애통해하였다. 그가 계모
홍씨를 모실 때 곡진히 받들어 길이 순종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이를 두고 친모(親母)
[因母]와 사이를 두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였으나, 병 든 누이를 돌볼 때에는
더욱 잘하였다.
성품이 자못 총명하였고, 문장이 뛰어나 것이 볼만하였다. 시(詩)를 써서 낙정(樂靜) 조공(
趙公)을 곡한 것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첫 부인은 윤씨(尹氏)로
부덕(婦德)이 있었고, 늘 그 아버지 목사공 형성(衡聖)이 현명하다고 칭찬받았으나 도장이
9세일 때 세상을 떴다. 이 때문에 내가 도장에게 대략적으로 들은 적이 있었으니, 이 말은
속이는 말이 아니다.
아아, 슬프도다! 태초가 몸가짐을 조심히 하여 후손을 남겨서, 도장이 길이 받아서 두 대에
걸쳐 제사를 받지 못하는 일은 없게 되었으니, 천도(天道)와 선함에 대한 의심도 조금
안정될 수 있으리라.
우선 이 글을 써서 비석에 새기도록 하였다. 그 돌아가신 조부는 휘가 행열(行烈)인데, 그
사적은 비갈(碑碣)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다시 적지 않는다. 이 해 여름 5월 신축일, 재종
동생인 박세채가 짓고, 그 아들 박태유(朴泰維)가 썼다.
숭정 기원 후 기미년 봄, 공의 묘와 부인 남원윤씨의 묘가 있는 도리촌(桃李村)에
세웠으나, 아천(牙川)의 뒤편 기슭에 표석이 묻혀 있는 것이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의
일이니 막연히 알지 못하였다. 지금 솔밭을 다시 개간하면서 발견하였으나, 세워야 할
곳의 지세가 좋지 못하므로 결국 공의 후처인 파평윤씨의 묘로 옮겨 합장하고, 이에
상석을 옮겨와 묘 앞에 세우고 그 전말을 기록하여 이하에 적는다.
무인년 가을, 9대손 승태(勝台) 삼가 기록

有明朝鮮成均生員潘南朴公諱世彙字道長之墓
孺人南原尹氏 祔左
崇禎甲午從祖兄道長甫遘疾于漢亰叔父府使公來自扶安新㝢治之久不
効至丙申春府使公感傷疾㞃遂卒道長扶櫬歸葬于其王父叅判公靈巖先
兆不以病力廢禮比去喪徃浴湖西之湯泉因復到漢亰省候伯久僉樞公至
己亥正月十三日竟以痘疾沒年僅三十五孤泰初時未舞象又從喪歸葬于
府使公兆次親舊送者哭之失聲至爲天道憾也其後十九年丁巳泰初始克
成家奉繼王母洪氏繼母尹氏無恙娵於林生二子弼諧弼憲遂以表墓之文
屬余且千里書再至嗚呼是寧不使余泫然而悲耶道長諱世彙與余俱爲議
政公曾孫其距潘南先生十世而遠少時異居乃以戊子秋遇于南郭舊第時
己同成進士與之周旋竊覸其爲人儀表閒雅辭氣恬夷絶無時俗女間 飾之習
固己藏諸心矣及道長之三至留栖掌苑後坊余屢訪焉敍論平生立心制事
多從家庭風範上出來至論當時人物又皆切中肯綮要其識趣所到自有過
人者然於一切經營嗜好盖泊如也今據其狀言道長在家靜掃一室必務近
書冊頣心神常以不逮先洲人宋氏爲痛其事洪氏委曲永順以謂世人間於
因母者便非子道也撫養病妹益修性頗聡悟爲文辭橫溢可觀間以詩哭樂
靜趙公稱者不容口初配尹氏甚有婦德每被其父牧使公衡聖所賢沒先道
長九歲於是以余嘗有槪乎道長達之知斯言之不誣也嗚呼悲哉抑泰初飭
身裕後永炭道長雨世未食之報如操右券則於向之疑天道與善者亦可以
少定矣姑書此俾刻之墓石惟其祖考名諱行烈具在大碑碣中故不復著是
歲之夏五月辛丑再從弟世采述族子泰維書 崇禎紀元後歲己未春立
公之墓及妣南原尹氏墓在於桃李村而表石埋置于牙川後麓距今二百餘年漠
然不知矣今於松田開墾時發見因相地不良遂遷奉合祔于繼妣坡平尹氏墓爰
伐牀石立于墓前記其顚末刻之于左 歲在戊寅秋 九代孫勝台 謹識

유명조선성균생원반남박공휘세휘자도장지묘
유인남원윤씨 부좌
숭정갑오종조형도장보구질우한경숙부부사공래자부안신우치지구불
효지병신춘부사공감상질횡수졸도장부츤귀장우기왕부참판공영암선
조불이병력폐례비거상왕욕호서지탕천인복도한경성후백구첨추공지
기해정월십삼일경이두질몰년근삼십오고태초시미무상우종상귀장우
부사공조차친구송자곡지실성지위천도감야기후십구년정사태초시극
성가봉계왕모홍씨계모윤씨무양추어임생이자필해필헌수이표묘지문
속여차천리서재지오호시녕불사여현연이비야도장휘세휘여여구위의
정공증손기거반남선생십세이원소시이거내이무자추우우남곽구제시
기동성진사여지주선절간기위인의표한아사기념이절무시속녀간 식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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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묘급비남원윤씨묘재어도이촌이표석매치우아천후록거금이백여년막
연부지의금어송전개간시발견인상지불양수천봉합부우계비파평윤씨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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