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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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서호면

전주이씨 오세군 봉사적비

주  소
서호면 성재리 625
건립연대
단기 4280 정해 모춘(1947년 3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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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5세(世) 군(君) 봉사적비

삼가 《선원보(濬源譜)》를 살피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완창대군(完昌大君)은 휘가
자흥(字興), 자가 성첨(聖瞻), 취헌(翠軒)이 그 호이다. 도조(度祖) 대왕의 첫째 아들이며,
용모가 영준하고 절륜하여 개연히 세상을 구제할 경륜을 품고서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은 하늘과 사람을 궁구했고, 지극한 효는 뿌리부터 큰
것이라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고, 우리 종실을 있게 한 공을 세웠으므로 병조판서(兵曹判
書)에 증직되고 군으로 책봉되었으며, 시호를 정간(貞簡)이니, 첫째의 전기이다.
그리고 휘가 천계(天桂)인 분이 있으니, 환조(桓祖) 대왕의 장자로 태조(太祖) 강헌대왕
(康獻大王)의 큰 형으로 자식은 없고, 환조(桓祖)가 특히 장자를 세워 집안을 잇게
하였으므로, 영성군(永城君)으로 책봉하였으니 두 번째의 전기이다.
휘 난(蘭), 자는 백(伯), 호는 청헌(淸軒)으로 문과 초시에 제3등으로 합격하였고, 이조참의
(吏曹參議)로 승진하였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포은(圃隱) 정몽주(
鄭夢周)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리학(理學)에 깊이 마음을 두었으며, 태종 때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특배(特拜) 되었고 좌의정(左議政)에 증직되었으며, 밀양군(密
陽君)에 책봉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으로 세 번째의 전기이다.
휘 사명(思明)은 자가 회지(晦之), 호가 오은(梧隱)이다.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좌찬성
(左贊成)을 역임하였으며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고, 죽은 뒤에 파주군(坡州君)에
봉작되었으니, 네 번째의 전기이다.
휘 순행(恂行)은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
知中樞府事)에 증직되었다. 세조 때 육신(六臣)의 충성을 힘써 말하였다가 의주(義州)
로 유배가는 해를 당했고, 숙종 무신년에 신원되어 안양군(安陽君)에 봉해졌다. 이것이
다섯 대군이 봉해진 것으로, 충효(忠孝)와 도학(道學)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본받을
만하며, 후세에 그 은덕을 드리웠으니 역사에 끊임없이 기록되었다.
누대가 전해져 내려와 휘 자망(子望)에 이르렀다. 그 호는 무위당(無違堂)으로 경학(經
學)으로 익위사(翊衛司) 익찬(翊贊)에 제수되었으나, 기미를 알고 남쪽으로 내려와 관산
(冠山)에서 자취를 감추어 손자 대남(大南)에 이르기까지 은거하여 살았다. 사복시(司僕
寺) 정(正)에 증직되었다. 점을 쳐서 둔(遯)괘를 얻었으므로 성재리(聖才里)에 은거하였고,
집안의 흔적을 숨기고 살다 종(終)을 맞이하였다. 자손이 성족을 이어갔는데, 늘 다섯
대군의 원우(院宇)와 기적비(記蹟碑)를 세워 후세 사람들이 선조를 추모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일은 크고 힘은 모자랐으므로 넉넉할 틈이 없었다. 정조, 순조 양대에 이르러
사우를 세우고 그 편액을 소발사(蘇渤祠)라고 하였으나 미처 봉안하지는 못했고, 또
비각에 이두(螭頭)를 새기려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원우가 다 철거되고
길이 비게 되었으니 영령들이 다 드러나고 비바람에 원우가 망가졌으며, 세웠던 기적비 6
기가 땅속에 묻혔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적체된 한이 아버지에게서 자식으로 전해지고 자식에게서 손자로 전해졌으나,
비로소 이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땅속에 묻힌 비석을 꺼내고 원우를 세운 옛터에
세웠으며, 오래 보고 추모할 바탕이 되게 하였다. 또 문중의 유사 병태(炳兌)에게 왕실
계보의 사실에 대한 기록을 가져오게 하여 천리에 걸쳐 이어져 나에게 문장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아! 내가 어둡고 늙은 정신으로 어찌 이것을 꾸미려고만 했겠는가? 다섯 군이 책봉된
바탕이 된 충성스러움과 도타움을 절실히 생각하여 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남아
대대로 자손들이 선대의 성의를 추모하도록 하고, 또 예부터 근원이 맑으면 흐름이
깨끗하고, 뿌리가 깊으면 높이 자란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용렬하지만 정말이지
고사하지 않고, 결국 기록에 의거하여 다듬었으니 이상과 같이 돌려보낸다.
병자(柔兆困敦)년 4월, 가선대부 향산수 해평 윤녕구 지음
단기 4280년 정해년 봄, 후생말학(後生末學) 평택(平澤) 임철주 삼가 씀

全州李氏 五世君封事蹟碑
謹按濬源譜完昌大君諱字興字聖瞻翠軒其號度祖大王第一男英睿絶倫慨
然有濟世經倫受學于易東禹先生
門學究天人至孝根大廬墓三霜功存宗枋 贈兵判而封君諡曰貞簡一傳而有
諱天桂 桓祖大王長子 太祖康
獻大王長伯大君無育 桓祖特命長子立嗣而封永城君再傳而有諱蘭字伯號
淸軒文科司馬擢第三陞吏議錄
原從勳受業于圃隱鄭先生門潛心理學 太宗朝特拜領敦寧 贈左相封密陽
君諡文莊三傳而有諱思明字晦之
號梧隱崇政大夫行左贊成以佐理功臣追封坡州君四傳而有諱恂行安義縣
監 贈嘉善大夫同中樞 世祖朝力
言六臣之忠謫義州被害 肅廟戊申伸雪封安陽君是五大君封而忠孝道學足
可爲百世師于後冠冕史不絶書累
傳至諱子望號無違堂以經學排翊衛司翊贊見幾南下晦跡冠山而率至孫大
南 贈司僕寺正筮遯幽土聖才里鞱
光鏟彩而終子姓仍居焉而每以營立五大君院字及記蹟碑後世而遂羹墻之
慕矣事鉅力綿不遑暶給至于 正純
兩朝年間設祠宇扁其額曰蘇渤祠而未果奉安又勒碑刻螭頭而未鐫忽植大
同撤院送諂永闕妥靈之擧而風雨攸
柏院宇剝落所營記蹟碑六埋地中豈不寒心哉其所來逮之恨父而傳子子而
傳孫始於今日竣發門議榤掘地中之
碑而鋟鏤事蹟立於院守舊址俾供久遠贍慕之資命門有司炳兌袖璿源事實
錄繭是千里属余以文之噫余以昏耄
精神安可漲華於湜切想五君封忠厚惻恒可芳流百世世世子姓慕先之誠意
又如攸古所謂源淸流潔根深倏達者
是也庸不固辭遂依蹟而潤色之好右而歸之
柔兆困敦淸和節 嘉善大夫香山守海平尹寗求 撰
檀紀四千二百八十年丁亥暮春者 後生末學平澤林哲周謹書

전주이씨 오세군봉사적비
근안준원보완창대군휘자흥자성첨취헌기호도조대왕제일남영예절륜개연유제
세경륜수학우역동우선생
문학구천인지효근대려묘삼상공존종방증병판이봉군시왈정간일전이유휘천계
환조대왕장자 태조강
헌대왕장백대군무육 환조특명장자립사이봉영성군재전이유휘란자백호청헌문
과사마탁제삼승이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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