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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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학산면

가의대부 김성운 유적비

주  소
학산면 용산리 887-1
건립연대
기해 10월(1899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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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가의대부 동지중추부사 김해김공 유적비

일찍이 듣건대 예천(醴泉)과 영지(灵芝)는 그 근원을 속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김해 김씨 동지공(同知公)의 유적을 자세히 보건데 그 징험이 더욱 크다.
공의 휘는 성운(聖運), 자는 차백(次伯)으로 집안은 왕실에서 나와 대대로 빛나는
가문이었으니, 신라를 거치며 번성하였다. 고려 조에는 휘 목경(牧卿)이란 분이
계셨으니, 삼중대광(三重大匡)의 지위에 이르렀고, 휘 보도(普都) 공은 첨의(僉
議)를 지냈으며, 시호가 충간(忠簡)이다. 휘 도문(到門) 공은 상서(尙書)를 지냈다.
우리 조선에 들어서는 휘 영정(永貞) 공이 양사(兩司)의 관직을 거쳐 예조참판
(禮曹叅判)에 이르렀고, 시호가 안경(安敬)이었으며, 휘 세구(世句) 공은 중종
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고, 휘 증수(增壽) 공은 성균관
생원이었으니, 모두 그 집안의 현달한 조상이었고, 세상에서 칭하기를 세 조정의
빛나는 문벌이라고 하였다. 증조부 휘 수호(守鎬) 공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옥구현령(沃溝縣令)을 지냈고, 전주(全州)에서 처음 영암으로 내려왔다. 그 후로
자손이 번성하였다.
조부 휘 명구(命俱) 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추증되었으며, 부친인 휘 도희(道
喜) 공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고, 그 처인 숙부인(淑夫人)은 청주김씨
김중석(金重碩)의 따님이다. 김성운 공은 숙종 무자년 8월 13일에 태어나 갑오년 3
월 15일에 졸하였다.
어려서부터 온화하고 공손하며 검소하였으니, 부모를 모실 때에는 효성을
다하였고, 남을 대접할 때는 예로 하였으며, 늘 남에게 차마 함부로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 부지런히 저축하여 가계가 점점 넉넉해졌다. 자선에 힘쓰고 구제에 성심을
다하였으니, 의탁할 데가 없는 사람에게 전장(田庄)을 주어 머물러 살게 하였고,
가난한 집의 자제들에게는 학비를 대주어 공업을 권장하였으며, 굶주린 채 밥을
먹지 못한 자를 보면 그들을 먹였고, 추운 날 해진 옷을 입은 자들을 보면 옷을
입혀주었으니, 세간에서 ‘옛날에 산 부처가 지금 다시 태어났다’고 칭송하였다.
갑진년 큰 흉년이 왔을 때 관직에 부임한 자들은 수십 명에 불과한데, 춘궁기 때마다
진휼하여 사방의 굶주린 사람들을 완전히 살려내었으니, 그 경지가 우뚝하여 누구라서
칭송하지 않겠는가? 남옥(蘊玉)은 값을 매기지 않아도 값이 스스로 지극해지고, 난초는
스스로 자기의 향기를 알지 못해도 사람이 향기를 맡는 것은 이치가 본래 그러한 것이다.
고을에서 도(道)에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자, 도(道)에서 조정에 추천하였는데 그 말이
임금의 귀에 들어, 더딤 없이 명이 내려와 활인당상(活人堂上)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특배 되었다.
아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을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입신(立
身)하여 칭찬하는 말이 넘쳐나고, 은혜가 융숭하게 된 것이 천성의 본래 그러함 때문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위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하늘이 내려준 것을 수양하지 않았다면,
사람으로서의 작위가 따르는 것이 이같이 되었겠는가? 그 행적의 탁월함을 보고 그
풍모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미루어 보면 ,정말이지 영지와 예천에 대한 말이 속임이
없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이름인 것이다!
그 처인 정부인(貞夫人)은 광산김씨 김하연(金夏延)의 따님으로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으니, 광조(光祚), 명조(鳴祚), 휘조(輝祚), 덕조(德祚)이고, 그 이하의 자손들은
번성하여 여기에 다 기록하지 않는다. 후손인 현정(顯廷), 형배(亨培), 권배(權培), 태배
(泰培), 갑배(甲培) 등이 공을 기억하고 그리워할 방법이 없으니 비석을 건립할 재물을
모으기로 한 것이 오래된 계획이었는데, 사손(嗣孫)인 문배(文培)가 실제 기록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청하였다. 나는 능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함부로 쓰지 못했으나, 모두 먼
조상을 추모하는 뜻이 지극한 것에 감응하였으므로 위와 같이 간략하게 서술한다.
가선대부 전 장례원경(前掌禮院卿) 청송(靑松) 심선택 기술
전주 후인(后人) 최병두 씀
기해 10월 22일 세움

贈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金海金公遺蹟碑
嘗聞醴泉灵芝不誣源根觀於金海金氏同知公遺蹟其驗尤大焉公諱聖運字
次伯系出璿
源赫世軒冕歷 羅繩繩逮 麗朝有諱牧卿三重大匡諱普都僉議諡忠簡諱到
門尙書八
我朝諱永貞應兩司禮曹叅判諡安敬諱世句 中宗朝文科禮曹判書諱增壽
成均生員皆
其顯祖而世稱三朝華閥曾祖諱守鎬通訓大夫沃溝縣令自全州始下灵岩子
孫雲仍焉祖
諱命俱 贈嘉善大夫考諱道喜漢城府左尹妣淑夫人淸州金重碩女 肅宗戊
子八月十
三日甲午三月十五日即公之生卒年月日也自幼溫和恭儉事親盡孝接人以
禮每有不忍
之心勤誠貯蓄家計稍饒務慈善誠救濟使無依抱者賜田庄而奠接貧窮子弟
學資勸工見
飢退食食之見寒解衣衣之世稱古之活佛今於更生當甲辰大荒之年自顧赴
官捐於數十
国而春三窮際賑恤四面完活飢口其所卓卓誰不稱頌蘊玉不朮價而賈自至
幽蘭不自知
其爲香而人香之者理固然也官報于道道薦達于 朝聽卑之天愈音不遲特
拜活人堂上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於戱公孝於親濟於人爲己任及立身声譽洋溢恩握
隆重非天性
之本然則烏能至此非天爵之修則人爵之從亦如是乎觀其行之卓異而推其
風之所自則
信乎灵醴之不可誣也正謂此哉配貞夫人光山金夏延女有四男光祚鳴祚輝
祚德祚而以
下繁不祿焉后孫顯廷亨培權培泰培甲培思慕不道鳩財伐石爲久遠計而嗣
孫文培以實
錄請余自顧微陋不敢容筆感具慕遙之極畧叙如右
嘉善大夫前掌禮院卿靑松沈選澤 述
全州后人 崔秉斗 書
己亥十月二十二日 竪

증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김해김공유적비
상문례천령지불무원근관어김해김씨동지공유적기험우대언공휘성운자
차백계출선
원혁세헌면력 나승승체 려조유휘목경삼중대광휘보도첨의시충간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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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휘영정응양사례조참판시안경휘세구중종조문과례조판서휘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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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배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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