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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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학산면

성경재 현부해 묘갈명 병서

주  소
학산면 용산리 54
건립연대
521년 현약곤돈 양월(임자 1912년 10월) 찬 *현부해 : 1770~183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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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재 현부해 묘갈명 병서

낭주 구림의 경치는 나라 안에 잘 알려진 것이다. 참봉인 현공이 처음 죽림정을
짓고 풍류를 즐겼고, 그가 세상을 뜬 뒤에는 우암(尤庵)과 문곡(文谷)이 그 정자의
기문을 썼고, 도암(陶庵)은 그 묘에 충신효제호해풍류(忠信孝悌湖海風流)라는
명을 썼다. 참봉의 양자 삼벽당(三碧堂) 약호(若昊)는 우암 선생을 사사하였다.
삼벽당의 장자 수초(守初)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차남은 호가 불능와(不能窩)인
수중(守中)으로 농암(農巖)과 삼연(三淵)에게 배웠다. 불능와의 아들 심초재(尋初
齋) 명직(命直)은 백부의 후사를 이었고, 이 사람이 대소헌(生大笑軒) 진택(鎭澤)
을 낳았으며, 진택이 차군헌(此君軒) 부행(溥行)을 낳았다. 이 3대가 모두 도암(陶
庵), 미호(渼湖), 성담(性潭) 등 여러 학자를 배웠다. 이 조손들이 또한 모두 경학을
배워 의를 행한 것으로 알려졌고, 후에 호남의 문헌 대가가 되었으며, 죽림정은
더욱 이름이 알려졌다. 공은 대소헌의 아들이자 차군헌의 아우이며, 참봉 인암(麟
巖) 양학겸(梁學謙) 공의 외손이다.
휘는 부해(溥海)이며, 자는 중원(仲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남과 다른 기질이
있었고, 어린 나이에도 엄숙하기가 성인과 같았다. 일찍부터 가문의 가르침을
받들어 차군헌(此君軒) 등 여러 제공과 함께 조부의 내곡(來谷) 옛 집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날마다 시(詩)와 부(賦) 여러 편을 배우고, 나무 3단을 하는 것을
과정으로 삼았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잠든 것이 10여 년 동안 한결같았으니, 그
각고의 노력이 이와 같았다.
부모를 섬길 때 지체(志體)를 모두 봉양하였고, 때맞춘 찬이 있어도 부모보다
먼저 입에 댄 적이 없었으며, 뜨거운 것을 올릴 때는 반드시 몸소 집어서 드렸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슬픔이 과해 예를 해쳐서 마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하였다.
대소헌 공이 살아 있을 때는 완전히 모친상을 끝낼 수 있었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나이가 50이 넘은 시점이었는데, 울부짖으며 가슴 치고 발 구르며 슬퍼하는 것이
한결같이 전의 상례와 같았다. 그리하여 그 모습이 흐릿해져서 건강을 해쳤다. 탈상을
하고서도 부모의 상을 슬퍼하여 세상에 나아가려는 뜻이 없게 되었으니, 결국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학계(鶴溪) 가에 벽일재(闢一齋)를 세우고 성경(誠敬)이라고 편액을 달고
좌우에 간편(簡編), 훈지(塤篪)라는 글을 붙여 번갈아 읽었다. 시(詩)에 특히 뛰어났는데,
4계절의 경치와 우연한 경치에 대해 읊은 것이 인구에 회자되었으니, 한 시대의 명류(
名流)로 상서 김이도(金履度), 학사 윤치영(尹致英)과 함께 시인으로 칭송받았다. 공은
몸가짐이 온화하고 공경스러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자제를
가르치는 것은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근본을 삼았다. 애가의 여러 은의를 겸하여
지극하게 하였으며 안팎을 잘 다스렸으니 한 시절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것이 그의
대략적인 행적이다.
헌종 기해년 7월 28일에 성경재(誠敬齋)에서 세상을 떴다. 그가 태어난 영조 경인년에
대응하여보면 나이가 71세였다. 장례는 군의 서쪽 부춘산 내동의 계좌(癸坐)에 치렀으니,
죽림정과의 거리가 몇 리 되지 않았다.
성주의 씨족은 고려의 병부상서 덕수로부터 이어져서 누대에 고관대작을 배출하였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는 휘 옥량(玉亮) 공이 예조판서였고, 그 후에 사직을 지낸 윤명 공이
처음 호서에서 이곳 낭주로 내려와 기거하였으니, 이 분이 죽림공의 5대조이다. 죽림공의
부인은 남평 문씨 주량의 따님으로 단정하고 정숙하여 부인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부인은 공보다 3년 늦은 계사년에 태어나셨고, 공보다 10년 늦은 무신년 3월 16일에
돌아가셨으며, 내동의 미망(未望)에 매장하였으니, 공의 묘와 서로 바라보는 곳이다.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아들은 상직(相稷), 상설(相卨), 상학(相鶴)이고, 딸은 최성순
(崔成淳), 문병삼(文秉三), 임성재(任誠材)에게 시집갔다. 손자로 인묵(麟黙), 주묵(周
黙), 영묵(英黙)이 있고 손녀로 조시승(曺始承), 신종기(愼宗杞), 박장환(朴章煥)의 부인이
있는데 모두 장자의 소생이다. 지묵(智黙), 화묵(和黙), 내묵(來黙)은 차남의 소생이며,
종묵(宗黙), 인묵(寅黙), 완묵(完黙), 택묵(宅黙), 김상하(金相河)의 처, 최기엽(崔琪燁)의
처는 모두 막내 아들의 소생이다. 증손과 현손으로 기동(基東), 기봉(基奉), 새생원을 지낸
기성(基性)이 있고, 용호(龍鎬), 준호(俊鎬)가 있다. 참봉을 지낸 용호는 기동의 후사로
입적되어 공의 대사를 실제로 주관하였다.
나는 죽림의 명성을 오랫동안 들었기에 한번 이 정자에 오르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도옹의 찬탄하는 글이 있었고, 또 연보(淵父) 송석공(松石公) 기로(綺老)가
일찍이 수관산을 나와 공의 종손인 극복재(克復齋) 계묵(啓黙)과 서로 호의가 돈독하였기
때문에 공의 가학이 성대한 것을 들어 알았고, 극복재의 아들인 재승(在昇)이 또 내게
와서 배웠으므로 지금 공의 편지가 와서 나에게 명을 청하였다. 의리상 병이 있고 또 좋은
문장을 쓰지 못하여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또 감히 현안이 되려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명(銘)
은 다음과 같다.
뿌리가 자라 가지에 이르니 아름답게 되었다.
노나라에 군자가 없음은 정말이지 여기서 취한 것이리라.
공의 성심과 공경스러움은 능히 좋은 이름 지켰네.
내가 명에 쓰일 문장을 지어 길이 보이노라.
521년 임자년[玄黙困敦] 10월[陽月] 하순, 덕은(德殷) 송병화 지음
숭록대부 전 이조판서 윤용구 씀

誠敬齋玄公溥海墓碣銘并序
朗州鳩林之勝聞於國中叅奉玄公徵始作竹林之亭觴詠絃誦以沒其世尤
庵文谷題記其亭而陶庵則以忠信孝悌湖海風流銘其墓叅奉系子三碧堂
若昊師事尤庵先生三碧之長子守初早世次子不能窩守中學于農淵不能
窩之子尋初齋命直爲伯父后是生大笑軒鎭澤是生此君軒溥行三世所師
陶庵渼湖性潭諸賢是也是祖是孫又皆以經學行義聞遂爲湖南文獻大家
而亭以之益名公大笑公之子此君公之弟而叅奉麟巖梁公學謙之外孫也
諱溥海字仲源生有異質甫齠齔儼若成人早承庭訓與此君軒及叔季諸公
肄業于王考來谷舊舍日以詩賦數萹薪草三負爲課程聞鷄鷲寢者十餘年
如一日其刻苦如此事親志體俱養時魚節饌未甞先入其口滫瀡炊□亦必
躬執其丁內艱哀毁踰禮如不欲生以大笑公在堂得完卒喪及外憂年踰五
旬而號哭擗踊一如前喪梅梅其容幾乎滅性服闋痛流風樹無意進取遂廢
公車業闢一齋於鶴溪之上扁以誠敬左右簡編塤篪迭呼尤長於詩風花雪
月遇境唫暢膾炙人口一時名流如金尙書履度尹學士致英并詩記而贊美
之公持身以溫恭勤儉爲本訓子弟以孝悌忠信爲主卿家衆恩義兼至內外
斬斬爲世矜式此其行治之大畧也 憲宗己亥七月二十八日考終于誠敬
齋對其生 英廟庚寅壽七十葬于郡西富春山內洞癸坐原距竹林亭爲數
里弱星州氏冑于高麗兵部尙書德秀自是簪纓相聯至我 朝有諱玉亮禮
曹判書其後司直允明始自湖西移居朗州是爲竹林公五世祖公配南平文
氏周亮女端淵靖貞配德無進生後公三年癸巳沒後公十年戊申三月十六
日葬于內洞未望原與公墓相望焉三男相稷相卨相鶴三女適崔成淳文秉
三任誠材孫男麟黙周黙英黙女適曺始承愼宗杞朴章煥長房出智黙和黙
來黙次房出宗黙寅黙完黙宅黙女適金相河崔琪燁季房出曾玄孫基東基
奉生員基性曰龍鎬俊鎬叅奉龍鎬出后基東而實主公祀余久聞竹林之名
欲一登斯亭而未能如陶翁所歎而且困從淵父松石公綺老嘗出守冠山與
公從孫克復齋啓黙相好甚篤夙聞公家學之盛而克復之胤在昇又從余遊
今以公狀來請銘義不可以病且無文辭非敢爲玄晏也銘曰 根培枝達有
爲猗猗魯無君子眞焉取斯惟公誠敬克守靑瓊我作銘章昭眎永年
五百二十有一年玄黙困敦陽月下浣德殷宋炳華 撰
崇祿大夫前吏曹判書尹用求 書

성경재현공부해묘갈명병서
낭주구림지승문어국중참봉현공징시작죽림지정상영현송이몰기세우
암문곡제기기정이도암칙이충신효제호해풍류명기묘참봉계자삼벽당
약호사사우암선생삼벽지장자수초조세차자불능와수중학우농연불능
와지자심초재명직위백부후시생대소헌진택시생차군헌부행삼세소사
도암미호성담제현시야시조시손우개이경학행의문수위호남문헌대가
이정이지익명공대소공지자차군공지제이참봉인암양공학겸지외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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