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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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영암읍
효자 신대유 비

주  소
영암읍 농덕리495-20
건립연대
경오 정양 (1930년 4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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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평산신씨 대유의 비
일전에 영암의 사문 신동씨가 그의 증조 조부의 효행에 대한 전후의 문서
두루마리를 등에 짊어지고, 울면서 나의 깊은 산 속 집에서 알려 말씀하시길,
세상이 평안함이 이어지는 때는 만나 공식적인 포상의 사다리가 없으니, 이 선세의
유적이 장차 없어져 전하지 못하는 통한의 위치가 없으니 엎드려 원하건대 글로써
실마리를 잡아서 영원히 쇠하지 않게 도모함에 나는 그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에
감탄하여 그 문서와 대략을 삼가 열람하니, 왕상은 얼음의 잉어가 튀어 오르고
서릉의 개구리가 솥으로 튀어 옴이니, 과연 효를 헤아려 보기를 공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공의 이름은 대유로 신씨는 평산 장절공 숭겸 후예 문희공 휘 개(槩)로
이어진다. 문절공 휘 상(鏛)은 그의 조부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부여받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저녁이면 자리를 정하고 새벽이면 살피며 겨울이면 따뜻하게,
여름이면 서늘하게 하며 그 정성을 지극히 다하였다. 어버이 명으로 과거에
나아가려 여관에 있는데 꿈속 마음에 문득 놀라서 급히 집에 돌아오려니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기가 어려운데, 호랑이 바람이 날개 되어 순식간에 집에 도착하니,
어버이 병환이 위독하여 큰 수저로 드렸으나, 공도 없어 하늘에 빌고 북두칠성에
기원하였으나 마침내 초혼에 이르렀다. 상례와 슬픔이 함께 지극하였다. 장례에
이르러서는 제도를 넘겨 여묘에 3년의 횃불을 고치니, 호랑이 또한 와서 호위하였다.
그의 어머니 질병에 걸려 수십 년에 풍조에 맞추어 정성을 다하였다. 상을 당하여는
슬픔에 여위어 소식이 끊어지니, 도내 사림들이 연명하여 포상하여 겨우 그 부역의
면제를 얻었다. 마침내 정문을 세우는 은전을 입지 못하여 억울함이 어찌 공의
후손에 그칠 뿐이랴! 공적인 공이 글 중에 논의됨이 정확하고, 크게 후학에게 모범이
되니, 공의 장자 직과 차자 경 또한 그 효도를 따라 할 수 있었다. 시경에 소위 효자가
다하지 아니하니 길이 너에게 아름다움을 주리라 하는 것이 이것인가. 오호라!
올바르도다.

때는 경오 정양월 하순, 장흥 고광선 기록


孝子平山申公諱大有之碑(효자평산신공휘대유지비)
日郎州之申斯文東背負其曾王考孝行前後文軸涕泣告余窮山屛舍曰
世値延康公褒靡階以此先世遺蹟將湮沒無傳痛恨無地窃願文以紀之
永圖不朽余感其追先之誠謹閱其狀其畧王祥曰躍氷之鯉徐陵隨鐺之蛙
此果間商量孝而非公之比也公諱大有申氏系平山壯節公崇謙后文僖
公諱槩文節公諱鏛其見祖也公自幼賦性至孝晨昏定省冬夏溫凊殫極
其誠以親命赴擧旅舍夜夢心忽驚動急趨還家跰步難移有虎風翼
瞬息到家則親瘠危谹刀圭罔功祝天祈斗竟至皐復則易戚俱至送終踰
制三燧廬墓虎亦來衛及其母李氏夫人嬰疾數十年迎合殫誠遭艱哀
毁頓絶自道內士林聯名褒狀僅得其烟役之除而竟未蒙棹楔之典其爲抑
鬱者奚止公後孫而已哉且公功於筆翰論議正確大爲後學矜式公之長
子糸式次子經亦克趾其孝詩所謂孝子不匱永錫爾類者是歟嗚呼韙哉
峕庚午正陽之下長興高光善識(시경오정양지하장흥고광선식)
(일낭주지신사문동배부기증왕고효행전후문축체읍고여궁산병사왈
세치연강공포미계이차선세유적장인몰무전통한무지절원문이기지
영도부후여감기추선지성근열기상기략왕상왈약빙지리서릉수당지와
차과간상량효이비공지비야공휘대유신씨계평산장절공숭겸후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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