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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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덕진면

송암 신재철 유허비

주  소
덕진면 운암리 693-1
건립연대
정사 2월(1917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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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선생 신공 유허비
훌륭한 행동을 알리고 집안을 표창하여 대대로 쌓은 명성을 퍼지게 하는 것은
조정과 집안의 공사(公事)이고, 비석을 세우고 유허를 정비하여 사모하고 기리는
것은 후손의 사사로운 일이다. 만약 세상의 운수가 쇠락하여 공사(公事)의 일이
사라지더라도 명문대가에서는 그 행실을 벼릿줄 삼고 덕을 빛나게 하여, 어쩌다
고관대작이 되어 공의(公議)를 병행할 수 있으니, 이것이 많은 선비들이 이것에
급급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송암(松菴) 신공(愼公)은 남도 유림의 사표가
되는 분으로 대략 알 수 있는 분이다.
공의 휘(諱)는 재철(在哲), 자는 명오(明吾)로 거창(居昌)의 씨족으로 고려 때 복야(
僕射)를 지낸 수(修)가 그 조상이다. 대대로 명망과 적이 있었으니, 관찰사(觀察使)
를 지낸 기(幾)가 처음 우리 조정에서 벼슬한 이래로 문장과 학문, 절개와 의리가
세상에 지극히 드러났다. 의직(毅直) 공은 통례(通禮)에 증직되었고, 후경(後庚)
공은 남쪽으로 내려와 영암에 정착하였다. 참판(叅判) 희남(喜男) 공은 경암성필(
敬菴聖弼)로 행실이 매우 훌륭하였는데 바로 공의 5대조가 되신다. 증조는 창정(
昌鼎) 공이고, 조부이신 사전(師典) 공은 □시호(視湖), 부친은 옥현(玉顯) 공이고,
모친은 전의(全義) 이씨(李氏)로 이양회(李養晦)의 따님이다.
공은 순조(純祖) 계해년(癸亥年)에 태어났다. 타고난 기품이 명수(明粹)하고 온아
(溫雅)하였으니, 천품을 얻은 것이어서 그 부모를 곁에서 봉양할 때는 스스로
어린아이처럼 하였다. 낳고 기르는 것이 뜻과 요체를 다 얻었고, 장사지내고 제사
지는 것은 그 정을 다하였다. 고아가 된 조카를 힘써 길러 마치 자기 자식처럼
하였고, 친식(親湜)은 다시 팔장옥(八場屋)을 만들지 않아 전심으로 위기지학(爲己
之學)에 힘써 그 성명(性命)을 궁구하였다.
방 벽에 구용구사(九容九思), 충신독경(忠信篤敬), 징분질욕(懲忿窒欲), 천선개과
(遷善改過)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평소에 말하기를 ‘남은 한 번 할 노력을 나는
백 번 하며, 남이 열 번 할 노력을 나는 천 번 한다. 그렇게 하고서도 그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있지 않다’고 하였다.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을 대개 한 시대의 이름난 덕을 근거로 하였다. 장여력(張餘力)
이나 송동곡(宋桐谷) 같은 여러 현인과 함께 도의를 익혀서 조예가 매우 높았다.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서 다닐 때, 내가[글쓴이, 宇萬] 어렸으므로 공을 곁에서 모셨는데, 예의와
체모를 보고 영접한 것이 자못 여느 사람과 달랐다. 평소에는 가타부타 별말이 없다가도
의(義)와 이(利)를 판별하는 일에 대해서는 시비를 분명히 하는 것이 마치 일도양단하는 것
같았다. 예제가 이국에 가까워지는 것을 엄금하고 집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매일 일어나
알묘(謁廟)하고 물러 나와 책방으로 들어가면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에서부터
《주자대전(朱子大全)》, 《송자대전(宋子大全)》,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등의 문집을
재산으로 여기고 생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최면암(崔勉菴)이 글을 올려 독신호학(篤信好擧), 수사선도(守死善道)라는 말로 그의
묘에 표창하였다고 하는데 대개 사실이다. 공은 향년 70세로 임신년에 졸하였고, 묘는
군의 동쪽 황기(黃峙) 손좌(巽坐)에 매장하였다. 남쪽 지방의 여러 사우(士友)들의 만장과
제문이 이어졌다. 일찍이 공은 소나무를 심어 뜰로 삼아 후조(後凋)의 의미를 지키고자
하였으므로 호를 송암(松菴)이라고 하였다.
부인은 광산(光山) 김씨(金氏) 은국(恩國)의 따님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병용
(炳鏞)이고, 손자는 종귀(宗龜), 종봉(宗鳳), 종린(宗麟)이다. 비석이 이미 갖추어지자
향촌의 여러 선비가 다투어 글을 보내어 나에게 명을 써달라고 하였다. 앞선 자는 최기성(
崔基性)이 시작한 것이고, 공의 증손인 용성(容晟)도 재촉하므로 내가 일찍이 공의 시대에
태어나 공의 덕과 의에 감복하였는데, 감히 늙고 병들었다는 것을 이유로 사양할 수
없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전해 듣기도 다른 말이오, 들은 것도 다른 말이로다.
공의 소견이 어째서 다른가? 한 마디는 공을 칭송하는 것이니, 군자들 가운데 으뜸이다.
남쪽 땅의 사표 됨은 공이 아니었던가?
텃밭의 소나무는 이제 근심이 없는데, 모두 시들어 홀로 푸르르니 볼 적마다 공의
유상(遺像) 같아라.
남에게 덮이듯 그 은혜 넓도다.
물길은 차마 마르지 않고, 땅은 차마 황폐해지지 않네.
꾀란 다 한가지라 비를 세우고 추모하노라.
오랜 시간이 흐르더라도 높은 산처럼 훤하리.
숭정 후 5주 병진 중추 전 참봉행주 기우만 짓고,
전 참봉 월성 최영조 씀
향다사(鄕多士) 최돈석 조병은 김석신 박항순 최상돈
최창홍 이종림 문규정 김영환 신종돈
박면상 최병두 최규양 김병휘 신용성
정사 2월 일 세움

松菴先生愼公遺墟碑
旌善表宅以樹凰聲朝家之公也立石遺墟寓慕羹墻雲仍之私也若局世運蔑貞公蔿
靡階則高景吉宅紀行昭德或涉於絃紳而并行於公議此多士之汲汲於爲是而松菴
愼公之爲南儒師表可槩而知公諱在哲字明吾居昌氏高麗僕射修基上祖世有名德
觀察使幾始仕 國朝文學節義克著于世毅直 贈通禮後庚南來家靈巖叅判喜男
敬菴聖弼有至行寔公五世曾祖昌鼎祖師典□視湖考玉顯妣全義李氏父養晦公生
純祖癸亥明粹溫雅得之天禀親側怡愉自幼然也生養兼志軆葬祭盡情文撫恤孤侄
若己子親湜不復八場屋專心爲己究極性命座隅書楊九容九思忠信篤敬懲窓室欲
遷善改過雅言曰人一已百人十己千不能變化氣質未之有也所與遊從盖一時名德
若張餘力宋桐谷諸賢講劘道義造詣甚高 嘗從吾先子遊宇萬幼侍側見禮貌迎接
頗珠餘人平居若無甚可否而至於義利之辨是非之分如一刀兩殷衣制之近於異國
者嚴禁而不于家每日早超謁廟退八書舍自心近二書至朱宋大全退泉諸集以爲家
計臨命猶撫摩不置崔勉菴尙書以篤信好擧守苑善道表其墓盖宲際也享年七十卒
壬申葬郡東黃峙巽坐南州士友挽誄相續嘗植松爲虒宲以寓後凋之志因號松菴夫
人光山金氏恩國女一男炳鏞孫宗龜宗鳳宗麟石旣具鄕多士馳書徵爲銘將命者崔
基性興公曾孫容晟亦轡宇萬嘗及公之母恨公德義不敢以老且病辭銘曰
傳聞異辭所聞異辭公吾所見于何異辭一辭称公君子長者南州師表非公時也菴畔
之松至今無恙衆凋獨翠覿公遺像惟庇乎人其惠則廣水不忍廢地不忍荒僉謀與同
立石羹墻百世在後高山景行
崇禎後五周丙辰仲秋前叅奉幸州奇宇萬撰
前叅奉月城崔永祚書
鄕多士 崔敦錫 曺秉殷 金錫信 朴恒淳 崔相敦
崔昌洪 李鍾霖 文圭政 金永煥 愼宗敦
朴勉相 崔秉斗 崔圭陽 金炳徽 愼用晟
丁巳二月 日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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