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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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신북면

가의대부 정인진 묘비

주  소
신북면 용산리 산 69-2
건립연대
계묘 중춘(1903년 2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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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의대부 행 전라감사 정인진의 묘

정부인 나주정씨 합장
정공(鄭公)의 휘는 인진(麟晋)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고려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신호
(臣扈)가 족보에 시조로 올라 있으니 바로 공의 할아버지이다. 아버지는 개성윤(開城尹)을
지낸 윤부(允孚)로 체찰부사(軆察副使)로 나주에 진을 내고 산에 창고를 설치하여 조운을
편리하게 하는 공을 세웠고, 김해김씨에게 장가들었다. 의성고부사(義盛庫副使) 군년(
君年)은 상고하기에 연대가 멀고 문적이 갖춰지지 않았다. 공의 생몰년도 마찬가지이며
아울러 덕을 표창하는 말도 전해지지 않는다.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문과에 등과하여 내시(
內侍)로 좌우위(左右衛) 보승(保勝), 낭장(郎將), 전중어사(殿中御使)를 지냈다는 것이고,
중고의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되어 비로소 전라도 감사(全羅道監司)가 되었고, 가문
대대로 전종백공묘(傳宗伯公墓)라고 한 것이 근년에 고 노상전감사묘(老相傳鄭監司墓)로
바꿔 부르고 있다.
…… 공이 처음 문과에 녹선된 것은 곧 박학하고 문장을 잘하는 것으로 세상에 쓰인
것이다. 내시가 된 것은 분명히 일에 성실하고 민첩하며 자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
덕이 보도(輔導)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가 위장(衛將)에 임명된 것은 분명히 그
기개와 절조가 난을 막기에 충분해서이고, 그가 전중어사가 된 것은 분명히 그 강직함과
준엄함이 ……충분해서이다. …… 곧 그가 공정하고 청렴하며 자애롭고 은혜로워서
충분히 백성의 불편함에 대하여 은택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공의 …… 이르러 세상에서 성현의 말을 공부하고 행동을 도탑게 하며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뚜렷하니, 기록할만한 사람은 조상 대대로 선업을 쌓고 인을 실천하며 뿌리를
깊이 하여 멀리 도달하게 하고, 근원의 맑은 흐름이 있는 사람이니 가히 그 얼개를 알 수
있다. 후대에 이름난 산에 숨어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을 기다리니 혹시라도 내 말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묘는 나주 원정면 척동 서일봉 아래 갑좌에 있고, 부인은 정씨로
합장하였다.
정씨 부인은 본관이 나주로 서운정(書雲正) 분(奮)의 따님이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존(
存)은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이 되었고, 재(在)는 문과에 급제하여 감사가 되었다.
딸 하나가 있는데 탁신(卓愼)에게 시집갔다. 네 재상이 있으니 현위인 이충(以忠), 교수인
이효(以孝), 군수인 윤처관(尹處寬), ……교리 양처공(梁處恭), 참봉 이형(李蘅), 정랑
방계문(房季文)이다. 처 장방(長房)은 현위 남철(男㬚), 주부 절(晣)을 낳았고, 군수 경은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묘에는 비석이 없었으나 …… 5백 년만이었다. 국초에 상박(尙朴)
하는 풍조가 지금까지 쇠퇴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사라져 무지한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것이 명철한
사람의 소장임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처음에 …… 모의하고 빗돌을 마련하여 새겼으나,
나에게 요청하여 삼가 공자께서 백리해(百里奚)를 논한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말하고,
그에 결부시켜 명을 지었다. 다음과 같다. 당(唐)의 방현령과 두여회는 전(傳)에는 실을
만한 것이 없고, 공(公)은 징험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가지고 얼개라고 했다. 밝은
조정의 명신(名臣)은 어진이를 닮았기 때문에 징수하는 것이 여기에 있고, 우뚝하게 저 당
(堂)의 도끼가 되었노라.
계묘 2월, 행주(幸州) 기우만이 찬술하고 후손 상직 씀.
유사(有司) 한필 용석 제면 제민

嘉義大夫行全羅監司鄭公麟晋之墓
貞夫人羅州鄭氏祔
鄭公諱麟晋貫光山高麗門下贊成事臣扈始登系
牒寔公大父考開城尹允孚以軆察副使出鎭羅州
設倉榮山以便漕轉就金海金氏義盛庫副使君年
其考年代邈遠文獻未備公生卒年同幷與表德言
彷而不傳所可徵信者登文科官內侍左右衛保勝
郎將殿中御使而己中古墓誌石爲人所發始據爲
全羅道監司與家世曰傳宗伯公墓近故老相傳鄭
監司墓璠合始□載譜錤□念我 朝一□之初□
無停選朝無停進而公始選文科則必其博學宏詞
文章是以需世其顚授內侍則必其謹敏詳□□德
足以輔導其撰任衛將則必禁氣節圖略定以禦侮
其委授殿中御使則必其剛直峻嚴足以黜□其□
任亥面則必其公淸慈惠足以澤民不寧維是帲幪
妣啓迪昌後白子及孫偉人達爵反於久遠至□
十歎世讀聖賢而敦行治者班班可述則所祖之積
慶累仁根深條達源淸流澯者可槩而知□後名山
之藏出於世則或知吾言之不誣矣墓在羅州元井
面尺洞遮日峯下申坐夫人鄭氏合封鄭氏籍羅州
書雲正奮女二男存文科監察在文科監司一女適
卓愼四宰縣尉以忠敎授以孝郡守尹處寬正□□
伯源敎理梁處恭叅奉李蘅正郎房季文妻長房生
縣尉男㬚主簿晣郡守脛 贈左贊成墓無顯刻□
五百年盖國初尙朴之風至于今未替也自是以往
則愈久愈泯無知樵牧或不知其爲哲人之藏始□
謀而具石疑所刻而諗于宇萬謹依鄒聖夫子論百
里奚故事而爲之說繋之以銘曰
唐之房杜傳無可載公無可徵以是爲槩熙朝名臣
肖承賢視所徵在此屹彼堂斧
歲癸卯仲春幸州奇宇萬撰 後孫尙直書
有司漢泌 聳錫 濟冕 濟敏

가의대부행전라감사정공인진지묘
정부인나주정씨부
정공휘인진관광산고려문하찬성사신호시등계
첩식공대부고개성윤윤부이체찰부사출진나주
설창영산이편조전취김해김씨의성고부사군년
기고년대막원문헌미비공생졸년동병여표덕언
방이불전소가징신자등문과관내시좌우위보승
랑장전중어사이기중고묘지석위인소발시거위
전나도감사여가세왈전종백공묘근고노상전정
감사묘번합시□재보기□염아 조일□지초□
무정선조무정진이공시선문과칙필기박학굉사
문장시이수세기전수내시칙필기근민상□ □ 덕
족이보도기찬임위장칙필금기절도약정이어모
기위수전중어사칙필기강직준엄족이출□기□
임해면칙필기공청자혜족이택민불녕유시병몽
비계적창후백자급손위인달작반어구원지□
십탄세독성현이돈행치자반반가술칙소조지적
경누인근심조달원청류찬자가개이지□후명산
지장출어세칙혹지오언지불무의묘재나주원정
면척동차일봉하신좌부인정씨합봉정씨적나주
서운정분여이남존문과감찰재문과감사일여적
탁신사재현위이충교수이효군수윤처관정□□
백원교리양처공참봉이형정랑방계문처장방생
현위남철주부절군수경 증좌찬성묘무현각□
오백년개국초상박지풍지우금미체야자시이왕
칙유구유민무지초목혹불지기위철인지장시□
모이구석의소각이심우우만근의추성부자논백
리해고사이위지열계지이명왈
당지방두전무가재공무가징이시위개희조명신
초승현시소징재차흘피당부
세계묘중춘행주기우만찬 후손상직서
유사한필 용석 제면 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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