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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간정(碧澗亭)

주  소
도갑사 용추계곡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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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간정(碧澗亭)


• 중건자 : 도갑사

• 창건시기 : 1600년대 중기 이전

• 위치 :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 계곡


 영암에는 남한의 금강산으로 알려진 월출산이 있다. 평야에서 우뚝 솟아올라 산전체모습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돌산으로 수많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월출산 깊은 곳에 고즈넉한 산사가 있으니 도선국사(道詵國師, 826~898)가 헌강왕 6년(880)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도갑사이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월출산의 산세를 굽어보고 불국토의 기운을 담아내기 위한 터를 이곳에 잡았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는 하늘빛이 온전히 내리고, 바람마저 숨죽인다. 널따란 절터 앞쪽으로 맑은 내가 흐르고, 뒤쪽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우측으로 흘러서 앞의 내와 합류한다.
절터 앞쪽 시내 건너에 넓고 평탄한 지대가 있는 것에 비해 절 뒤쪽으로는 조용한 계곡이 높은 곳을 향해 굽이굽이 올라간다. 절 뒤쪽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계곡이 이어지고 청아한 계곡물 소리가 들려온다. 여름에는 주변의 연초록으로 포위되어 폭포수와 새소리로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여울은 화음에 맞춰 녹수(綠水)를 토해내고 있다.


 이곳에 작은 정자 하나 있으니, 벽간정(碧澗亭)이라 한다. 협소한 공간에 맞추다 보니 6 각형의 작은 정자로 건립되어 독특한 창덕궁 후원의 관람정(觀纜亭)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지금의 정자는 근자에 세운 건물로 내방객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벽간정(碧澗亭)이란 물빛이 매우 푸르게 보이는 맑은 시내, 벽계산간(碧溪山間)의 준말로 은거 생활을 하며 유유자적했던 옛 선비들이 좋아하는 정자 이름이다. 하지만 특정한 인물을 중심으로 건립되고 이용되었던 일반 정자와는 달리 영암의 벽간정은 도갑사 도량을 이루는 부속 건물의 하나이다. 그렇다보니 영암의 누정을 소개하는 옛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월출산을 오르면서 도갑사에 방문했던 문인이 남긴 글을 통해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쓴 <碧澗亭(벽간정)>이라는 제목의 시가 ≪ 농암집(農巖集)≫에 있다. 47


南崖多楓樹(남애다풍수) 남쪽 기슭 단풍나무 많이 자라고

北崖多竹林(북애다죽림) 북쪽 기슭 대나무숲 우거졌는데

淸陰一澗合(청음일간합) 맑은 그늘 한 시내에 어우러진 곳

中見綠潭深(중견록담심) 그 가운데 보이나니 깊어 푸른 못

植杖跂幽石(식장기유석) 단장 기대 돌 위에 앉았노라니

飛泉灑素襟(비천쇄소금) 날리는 물 흰 옷깃 흩뿌리누나 

김창협이 쓴 시와 도갑사 계곡의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과연 김창협은 도갑사 벽간정에 올라 이 시를 읊었을까?
 농암 김창협은 본관이 안동(安東)이며, 자(字)가 중화(仲和), 호(號)가 농암(農巖)이다.
그의 부친은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으로 이조참의, 이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김수항은 1675년 7월에 영암으로 유배되었다가 1678년 철원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김수항은 1680년 영의정이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사십칠 팔 세이고, 그의 아들 김창협의 나이는 스물여섯 일곱이었다.


이 시는 김창협이 아버지를 방문했을 때 월출산을 방문하고 남긴 글이므로, 벽간정은 1675 년 이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시

정자는 지금처럼 육각형의 평면구조에 기와를 올린 건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창협은 이 시 외에도 월출산에 세 번을 오르고 나서 여러 수의 시를 남겼다.


 벽간정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창주(滄洲) 정상(鄭祥, 1533~1609)의 <月出山遊山錄( 월출산유산록)>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조선 중기 문인으로 자(字)는 중신이고, 호(號)는 창주, 본관은 나주이다. 설재 정가신의 후손이다. 그는 1574년 별시에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정운·송희립 등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4년 음력 4월 26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월출산 유람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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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이 적었다. 48


 29일은 흐렸다가 개었다. 영암군 향교 유생의 제술(製述) 15도(度)를 평점(評

點)하고서 중들에게 가마를 메라고 하여 골짜기를 따라 내려왔다. 오르락내리락

10여 리를 가서 도갑사 벽간정(碧澗亭)에 이르러 용추(龍湫:용수폭포) 가에서

쉬었다. 부드럽고 맑은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고 물기가 살갗에 스며드니,

괴로움이 홀연히 씻기어 앉은 채 돌아가야 하는 것도 잊었다. 중에게 못 기슭의

초목을 잘라내게 하였더니 사람 그림자가 못에 드리워 한층 마음이 상쾌하였다.
임탄, 송정란, 최홍섭, 최위가 찾아와서 만났다. 두부를 만들었는데 한참을 주린

뒤라서 58꿰미를 먹었더니 대단히 배가 불렀다.
 도갑사는 호남의 거찰인데 병영과 수영에 침학(侵虐)을 당하여 중 세 사람만이

불공을 받들고 있어 방마다 무너지고 파손되었으니 오래가지는 못할 형편이다.
밤에 선방에서 묵는데 80세의 노승 혜원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축(詩軸)

에는 소재 노수신, 석천 임억령, 청련 이후백, 자순 임제의 장편 시가 있는데

필적이 진기하였다.


 구정봉에서 내려오는 길목을 묘사한 글이다. 벽간정의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용추 못 가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도갑사에는 벽간정과 더불어 산취루(山翠樓)가 있었다. 김수항의 ≪文谷集(문곡집)≫에 산취루(山翠樓)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49


......(전략) 도갑사 남쪽에 있다 해서 그냥 남암(南菴)이라고 불렀는데, 내가

이름을 고쳐 ‘수남사’라 하였다. 누각에는 ‘산취루(山翠樓)’라는 이름을 붙였다.
누각의 사면이 모두 산으로, 푸름이 항상 이곳에 모이기 때문이었으니,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실경을 기록함이었다......(후략)


......(전략) 以其南於道岬 喚爲南菴 余改命曰水南 名其樓曰山翠 以樓之四面皆山

蒼翠常環合於此 志實境也 烈仍請余一言以記之 玆地也不幸而不遭詵公 蕪沒千百

年之久 幸而遭敏師 得以開拓於千百年之後 可謂奇矣 若余之來游 不在蕪沒之日

而在開拓之後 其亦幸也 非不幸也 斯不可不識

(......이기남어도갑 환위남암 여개명왈수남 명기루왈산취 이루지사면개산

창취상환합어차 지실경야 렬잉청여일언이기지 자지야불행이부조선공

무몰천백년지구 행이조민사 득이개탁어천백년지후 가위기의 약여지래유

부재무몰지일 이재개탁지후 기역행야 비불행야 사불가불식)


 김수항은 <水南寺記(수남사기)>에서 “효종7년(1656)에 이르러 스님 석민(釋敏)이 이곳을 살피다가 알아보고 지난날에 빠뜨렸음을 탄식하였다. 이에 잡목을 베어내고 산비탈을고르게 다듬고, 뜻을 같이하는 한두 사람들을 불러 재목을 모아 집을 지었으니, 불당과 승방이 차례로 완성되었다. 또 그 앞쪽에 몇 개의 기둥으로 다락을 세웠으니, 올라가 조망하기에 편하도록 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는 산취루(山翠樓)라 이름한 이유를 “누각의 사면이 모두 산으로, 푸름이 항상 이곳에 모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내가 남쪽으로 유배 와서 마침 월출산 아래에 처했는데, 일찍이 손님들을 이끌고 절에 이르러 누각 위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었다. 그 그윽하고 싱그러운 풍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즐기느라 돌아가기를 잊게 만들었으니, 석민 스님께서 개척한 공이 없었다면 우리들이 어찌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라며 의미를 달았다.


 김수항이 <憶朗州八絶(억낭주팔절)-기억하는 영암 팔절> 중에 <山翠樓(산취루)>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50


招提道岬勝(초제도갑승) 도갑사(道岬寺)의 아름다운 경치

巖瀑北池幽(암폭북지유) 바위 폭포와 북지가 그윽했지

最憶水南寺(최억수남사) 가장 생각나니 수남사(水南寺)

題詩山翠樓(제시산취루) 산취루(山翠樓)에서 시 지었지


 김수항에게 도갑사 산취루는 그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으로 강한 인상을 주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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