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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춘정(富春亭) • 창건자 : 강한종(姜漢宗) • 창건시기 : 1618년 / 1672년 중건 / 1866년 중건 / 1957년 재건 • 위치 : 영암읍 망호리 20 영암 부춘정(富春亭)은 1618년 청암(淸菴) 강한종(姜漢宗, 1549~1622)이 건립한 정자이다. 동강가에 유별나게 맑고 깨끗한 고을이 있으니 오직 나의 고조할아버지 청암부군 휘 한종께서 지팡이 짚고 신발 신던 곳이다. 용맹한 기상으로 문예가 탁월하고 충과 효를 겸비하여 일찍이 무과에 등과하여 훈련원정에 이르렀고 나아가 평양 판관과 병마절제사를 겸하여 제수받았다. 있어서 훌륭한 방어책을 내어 여러 차례 포의의 가르침을 입었다. 정유재란에 또한 의병을 일으켜서 목포전투에서 기이한 공적을 세웠다. 성상께서 무훈을 베풀어 주셨고 광해정란에는 항거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구원할 바를 얻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정자를 짓고 처마에 여러 편액을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부춘정 아랫머리에 기이한 여울이 있고 여울 위로는 기이한 석대가 있으니 옛날 한나라 시대 엄자릉이 여울 위에서 낚시하던 석대와 같다 이르더라. 부군께서는 이곳을 사랑하여 날마다 낚시하며 유유자적하는 곳으로 삼았다. 府君諱漢宗杖履之所也府君以豪邁之姿文藝卓異忠孝兼備早登武科官至訓鍊院正 出拜平壤判官兼兵馬節制使 宣廟壬辰島夷寇扈 駕龍灣多陳捍禦之策累蒙褒 之敎 丁酉又興義旅木浦之役大樹奇功錄扈 聖宣武勳及至光海政亂累抗疏不球遂棄官歸 鄕構亭數掃扁楣曰富春亭下有七里灘之奇灘上有一石坮之異古所謂子陵灘上釣坮 也府君取而愛之日以漁釣爲自適 암부군휘한종장리지소야부군이호매지자문예탁이충효겸비조등무과관지훈간 원정출배평양판관겸병마절제사 선묘임진도이구호 가룡만다진한어지책누몽포 지교정유우흥의려목포지역대수기공록호 성선무훈급지광해정란누항소불구수기관귀향구 정수소편미왈부춘정하유칠리탄지기탄상유일석대지이고소위자릉탄상조대야부군취이애 대개 정자가 처음 세워진 것은 만력 무오년 삼월로 이미 55년의 오랜 세월이 되었다. 부군께서 별세하신지 또 51년이 되어 문도들도 쇠락하고 정자 또한 퇴락하여 무너질까 항상 간절히 여기며 개탄하였다. 이에 지난 가을에 비로소 공사를 시작하여 금년 봄에 마쳤다. 落亭又頹圮恒切慨歎玆於昨秋始起工役卒於今春.....(후략) (개정지시건재어만력무오삼월이위오십유오년지구부군지몰역위오십일년문도령 락정우퇴비항절개탄자어작추시기공역졸어금춘.....(후략)) 肯構欺亭樂在中(긍구기정락재중) 정자를 지으니 즐거움이 이 속에 있구려 我有石坮坮上釣(아유석대대상조) 나는 석대(石坮)에 앉아 낚시질을 하며 斜風細雨夢嚴公(사풍세우몽엄공) 비껴 부는 바람 가랑비 속에 엄자릉 꿈을 꾸노라 1885년에 심노일(沈魯日)이 작성한 <富春亭記(부춘정기)>의 내용도 중수기와 비슷하다. 동강이 특별하다. 맑은 물이 격랑이 치듯이 칠 리까지 흐르고 산 같은 너럭바위 하나가 있어서 옛날 노인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엄자릉(한나라 은사 엄광) 이 여울가에서 낚시하던 돈대라 하였다. 그 바위 아래 하나의 작은 정자가 있으니 부춘정이라 일컫는다. ......(후략) 小亭稱曰富春 (기환산이용자수만동강별청수격칠리산반일석고노상전왈자능탄상조대야하유일 소정칭왈부춘) 정내에 남아있는 차운시 중에 동강을 언급한 시가 발견된다. 진주강씨 후손 해창(海蒼) 강난형(姜蘭馨, 1813~?)이 지은 차운시이다. 莫敎羊裘釣此中(막교양구조차중) 양가죽을 입고선 이곳에서 낚시질 마오 有釣當徒淸渭釣(유조당도청위조) 낚시를 함에 마땅히 맑은 위수에서 낚음을 쫓으니 君非嚴子是姜公(군비엄자시강공) 그대는 엄자릉이 아니고 강공이라네 정내에는 <富春亭記(부춘정기)>를 비롯하여 옥봉(玉峰) 백광훈(白光熱, 1537~1582), 진사 김광택(金光宅) 등이 쓴 시 현판 8개가 걸려 있다. 백광훈의 시를 보자. 老鰲搖首隨湖中(노오요수수호중) 늙은 자라 고개 흔들다 못으로 빠졌는가 千年直破煙霞秘(천년직파연하비) 천년 동안 안개같은 감춰진 비밀 이제 깨어지고 風月依然屬此公(풍월의연속차공) 아름다운 풍월(風月)은 그 분의 예전 그대로 이어라 이 시의 제목은 <暎湖亭(영호정)>으로 ‘민사인 명 덕봉(閔舍人名德鳳)을 차운하였다고 적고 있다. 용계(龍溪) 민덕봉(閔德鳳, 1514~1573)은 조선 전기에 집의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영암 출신이다. 그는 금정면 아천리 1254번지 여흥민씨 제각에 모셔져 있다. 정내에 남아있는 차운시 중에는 백광훈을 지칭한 글도 있다. 송암(松菴) 강한혁(姜漢赫, 1793~?)이 쓴 차운시이다. 富春亭起八湖中(부춘정기팔호중) 부춘정은 여덟 강호 가운데에서 일어난 것이다 雖靡扶鼎猶名勝(수미부정유명승) 비록 성상이 내려준 것은 아니건만 오히려 명승이네 管領吾宗不換公(관령오종불환공) 우리 종문을 살펴보니 공과 바꿀 수 있는 사람 없네 차운시 중에는 영보리 출신 신철흥(愼哲興, 1720~1783)의 작품이 전하고 있다. 南山面面摠奇峯(남산면면총기봉) 남산의 모양마다 모두 기인한 봉우리 人說眞遊在此中(인설진유재차중) 그 누가 말하기를 참다운 즐김이 이 가운데 있다더라 碧海高張平地會(벽해고장평지회) 푸른 바다 높이 펼쳐져 평지와 만났구나 名區堅秘卽天公(명구견비즉천공) 명승지를 인색하게 감추니 그는 곧 조물주인가 하노라 四面奇觀環沔中(사면기관환면중) 사면에 기이한 광경 옥같이 보이고 馬頭雙笛令人惱(마두쌍적령인뇌) 마두의 쌍피리 소리 사람을 번뇌케하고 風物公然付諸公(풍물공연부제공) 풍물은 공평하게 그대에게 맡겼네
영암읍성 북쪽 망호정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영암천을 만나는 지점에 나지막한 산이 나오는데 그곳에 부춘정이 있다. 과거에는 이곳까지 돛단배가 접안 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작은 연지로 축소되어 포구의 흔적만 남아있다.
부춘정은 학들이 깃드는 오래된 나무숲이 있는 야트막한 부춘봉 자락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흙섬의 방지를 중심으로 송죽과 연꽃이 심어진 연못을 두어 유관(遊觀)하는 흥을 더해주고 있다. 월출산은 정면으로 맞바라보는 위치에 있고, 월출산 동쪽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영암천이 부춘정 왼편으로 감돌아 영산강으로 흘러간다.
부춘정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앞쪽 한 칸은 툇마루를 두고, 뒤쪽 한 칸은 벽을 세워 방을 만들었다. 좌측면에는 두 자 폭으로 쪽마루를 두었으며, 우측에는 방 옆에만 쪽마루를 두었다. 가구는 기본적으로 오량구조를 보이지만 대들보 대신 중간 기둥과 앞뒷쪽 기둥에 각각의 들보를 두고, 그 가운데에 중도리받침장여와 중도리를 올렸다. 앞쪽 툇마루 부분과 뒷쪽 내실이 각각 ‘ㅅ’자 형태가 중복되어,‘ㅆ’자 형으로 짜여있는 독특한 형태이다.
앞뒤 중간 기둥 위에 주심도리에 상응하는 별도의 구조재를 더 설치하여 이를 중심으로 대청마루 윗부분과 방의 상부가 각각 병렬조합식 삼량가구 구조를 취하는 2중적 가구 수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예는 한국의 전통 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양식이라 한다.
앞쪽 툇마루 천장은 중도리와 가운데 기둥 도리 위에 짧은 단연을 두어, 마치 삼량집 아래 툇마루가 있는 듯한 효과를 보이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간결한 민도리식 내지는 익공식으로 꾸몄다. 건축 구조적인 면으로 보면 전후 병렬식 겹집이다. 부춘정은 삼 단의 댓돌로 쌓은 세벌대 위에 건물을 지어 조망을 좋게 만들었으며,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앞연못에는 가운데 타원형 섬이 조성되어 있다.
부춘정은 진주인 강한종이 교류 및 학문 연마를 위해 지은 정사(精舍)이다. 그의 본향은 원래 강진이며, 아버지 강달령(姜達齡)이 이곳 후정마을로 이사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부춘정이 건립된 내력은 강한종의 현손(玄孫)인 강필문(姜弼文, 1622~1683)이 1672년에 작성한 <富春亭重修記(부춘정중수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낭주성의 북쪽으로 10리쯤에 산수가 빼어난 승지가 있으니 곧 부춘산 아래
선조 임진년에 섬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노략질함에 임금을 신의주로 호송함에
朗城之北里許有山水擅勝之地卽富春山下桐江之上別開淸絶之洞惟我高祖考淸庵
(낭성지북리허유산수천승지지즉부춘산하동강지상별개청절지동유아고조고청
지일이어조위자적)
여기서 낭성(朗城)은 영암읍성의 옛 이름이며, 동강(桐江)은 영암천의 다른 이름임을 알수 있다. 강한종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업적을 남겼으나, 광해군 때 낙향하여 이곳에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하며 지인들과 친교를 나누며 생애 말년을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중수기에는 정자가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盖亭之始建在於萬曆戊午三月已爲五十有五年之久府君之沒亦爲五十一年門徒零
여기서 정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무오년 3월이라 하였으니, 이는 1618년 3월을 의미한다.
또한 강한종은 51년 전에 별세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1622년임을 알 수 있으며, 부춘정이 오래되어 중수한 해는 1671년에 시작하여 1672년 봄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중수기에는 정자 주인의 감회를 담은 시가 있다.
桐江七里富春峯(동강칠리부춘봉) 동강 칠 리 부춘봉(富春峯)에
부춘정의 주인이던 강한종은 칠리탄에서 낚싯대를 드리며 세월을 낚던 한나라의 엄자릉을 꿈꾸고 있었다. 정자 이름인 부춘(富春)의 의미가 그러하다.
위 시에 등장하는 ‘동강칠리(桐江七里)’가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전략) 특별이 기이하고 (월출)산에 둘러싸여 있는 물가가 수만 개인데
奇環山而湧者數萬棟江別淸水激七里山盤一石古老相傳曰子陵灘上釣坮也下有一
桐江三面富春蜂(동강삼면부춘봉) 부춘봉 삼면의 동강
강난형은 강악흠(姜嶽欽)의 손자이며, 강노영(姜魯永)의 아들이다. 1860년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후 이조참의, 좌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知是蓬萊第一峯(지시봉래제일봉) 이제야 알겠네 봉래산(蓬萊山) 제일봉을
이 시가 부춘정에 있는 연유는 앞서 본 <부춘정중수기>에 등장하는 강한종의 시와 운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강한종의 시는 1618년에 작성된 것이므로 시대적으로 백광훈(白光勳)의 시를 차운하여 부춘정을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尙友留詩白玉峰(상우류시백옥봉) 높이 받드는 벗 옥봉(백광훈)이 시를 남기니
여기서 강한혁은 백광훈이 시를 남겨준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백광훈의 시가 부춘정을 상정한 시일 경우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 경우 부춘정이 백광훈이 살아생전에 있었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실제로 ≪玉峰集(옥봉집)≫에 등장하는 <富春別墅(부춘별서)>는 장흥에 있던 백광훈의 서실(書室)을 노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암 출신 유학(幼學) 김광택(金光宅, 1767~?)이 부춘정의 감흥을 읊은 시가 있다. 그의 본관은 천안이고, 자(字)는 한익(漢翊)이다.
江湖滿地高一峰(강호만지고일봉) 강호와 널따란 대지에 하나의 높은 봉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