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암정(南巖亭)
• 창건자 : 양달사(梁達泗)
• 창건시기 : 1548년
• 위치 : 도포면 자라봉길 146
도포면은 대부분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영암천과 맞대어 있다. 그나마 가장 큰 산은 태봉산으로 해발 84미터쯤 되며, 산봉우리를 경계로 시종면과 나뉘어진다.
태봉산 남쪽 기슭에 송죽정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어귀에 남암정이 있다. 태봉산은 옛날 왕자(王子)의 태(胎)를 묻었다고 하여 태산(胎山) 또는 태산봉(胎山峰)이라 하였다.
과거에는 이곳 언저리까지 영암천이 넘실대고, 멀리 월출산이 한눈에 조망되었을 것이다.
본래 태봉산 남쪽 기슭에는 제주양씨 집안의 괴목정(槐木亭)이 있었다. 아마도 홰나무를벗 삼아 정자를 지었을 것이다. 지금은 괴목정은 사라지고 괴목정마을만 시종면 봉소리에 속해있다. 남암정마을에는 제주양씨 재실 현훈재(顯訓齋)가 400여 년 전에 지어 자리하고 있었다.
남암정은 남암(南岩) 양달사(梁達泗, 1518∼1557)가 봉호정마을 본가에서 분가하여 강마지소(講磨之所)로 삼은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수련에 힘썼으며, 을묘년에 의병을 일으키는 본거지로 삼았다.
양달사(梁達泗)는 조선 중기 의병장으로 자(字)는 도원(道源)이고 호(號)는 남암(南岩) 이며, 제주(濟州)양씨다. 그는 제주 주부(濟州主簿)를 지낸 양승조(梁承祖)의 둘째 아들로 도포면 봉호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537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1546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전라좌우우후(全羅左右虞侯)와 진해 현감(鎭海縣監)을 역임하였으며, 1553년에 해남 현감(南海縣監)에 부임하여 있던 중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시묘살이하고 있었는데, 1555년에 을묘왜란(乙卯倭亂)이 일어났다.
을묘왜란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 전인 1555년에 일어났다. 이진포와 달량진에서 육지로 상륙한 왜구들에 의해 며칠 사이에 영암군 관아가 그들의 발길에 짓밟히게 됐다.
왜구들은 약탈한 재물을 소와 말에 나누어 싣고 아무 거리낌 없이 영암읍까지 돌진하여 영암 향교에 들어가 진을 쳤다.
이에 조정에서는 지휘 체제를 정비하여 전라 방어사 김경석으로 하여금 한양의 금군(禁軍) 500여 명을 지휘하여 현지 영암에 도착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친상을 당하여 해남 현감직을 그만두고 영암읍에서 9km 거리에 있는 봉호정마을에서 시묘살이하던 양달사는이 비보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상중(喪中)의 몸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던 그는 그 사촌 동생으로 부제학(副提學) 의 자리에 있던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에게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상의했다.
양응정은 “충효일체(忠孝一體)라 하거늘 어찌 이 난리를 보고만 있으려 합니까” 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24 이에 충효일체(忠孝一體)라 하여 형 양달수(梁達洙) 동생 양달해(梁 達海) 양달초(梁達礎)와 함께 의병을 모아 영암읍으로 향하였다. 양달사는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진두지휘하여 왜구를 물리쳤다. 왜구들이 퇴각하자 양달사는 도포면 봉호정마을로 돌아가 시묘살이를 이어갔다. 이 왜변은 양달사의 창의군 활약에 힘입어 진압했으나, 자신은 상을 당한 사람이 전쟁에 출전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관군을 이끌었던 이윤경(李潤 慶, 1498~1562)에 그 공을 모두 돌렸다.
결국 이윤경은 그 공으로 전라감사가 됐고 뒤에 병조판서까지 됐다. 양달사는 부상한 창독 (瘡毒)을 뿌리 뽑지 못해 고생하다 1557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