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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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호정(望湖亭)

설명요약
경주인 이주남의 강학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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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호정(望湖亭)


• 창건자 : 이주남(李柱南)

• 창건시기 : 1680년 건립/1785년 중건/1916년 중건

• 위치 : 영암읍 망호정길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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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호정(望湖亭)은 영암읍 경주이씨 집성촌인 망호정마을에 있다. 1680년 망호(望湖) 이주남 (李柱南, 1611~1698)이 강학소로 건립하였으며, 망호정은 그의 호(號)이다. 이 건물은 1785년 중건, 1916년 재건하였으며, 이 마을의 젊은이들이 문무를 배우는 수양처이자, 마을을 방문하는 여러 문객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경주이씨 문각의 기능을 주로 하고 있다. 뒤편에 취벽정(醉碧亭)이 있었으나 1960년대에 무너졌으며, 이때 취벽정의 현액(懸額)들을 망호정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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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정자이다. 좌측 한 칸과 우측 세 칸은 온돌방이며, 가운데두 칸은 대청마루 형태이다. 도리는 기둥위에 대들보가 바로 올라간 민도리 형식에 가구는 간단한 삼량구조를 보이고 있다. 종도리는 대들보 위에 기본적인 판대공을 올렸다. 건물 앞뒤로 길게 쪽마루를 두어 공간성을 확보하였다. 좌측 한 칸은 어느 시기에 증축하였으며, 우측 앞뒤 두 개의 기둥 주초석은 3자 높이의 팔모기둥으로 끼워 넣었다.


망호정을 설립한 배경에 대해 이주남은 <望湖亭記(망호정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41


우리나라 산들은 백두산을 조종(祖宗)으로 하여 삼천리에 굽이치는데, 중간에 금강산(金剛山)과 지리산(智異山)이 되고 월악산(月岳山)에서 꼬리를 맺는다. 우뚝하여 황금 부용(芙蓉)이나 매화의 서리 같은 정기(精氣)가 영혼을 기르니 바닷가에서 하늘로 솟아나 남으로는 영주(瀛洲, 제주)와 통하고 북으로는 장성 (長城)과 접한다. 그 앞에 백 리의 평호(平湖)가 있어 옷깃이 되고 허리띠가 되었으니, 웅장한 산과 수려한 물 가운데 억만년 동안 아끼고 감추어 온 승경(勝 景)이 아니겠는가?
우리 이씨(李氏)는 동암(東庵, 李瓊)과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이후로 문학이 서로 전수되었고 관직이 대대로 이어졌다. 명종(明宗) 을사년(1545)에 증조부이신 호암공(湖巖公)께서 징전비후(懲前毖後)의 경계로 삼고자 고양(高陽)으로부터 세번 옮겨 오시어 남쪽에 이르러 월악산 아래의 녹문(鹿門)에 은거하셨다. 조부 월재공(月齋公)은 임진년의 난리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국하셨으니, 우리 가문의 세덕(世德)은 충효(忠孝)와 문무(文武)일 따름이었다.
옛 건물이 치우치고 좁아 이사할 생각을 하였는데, 거문고 품은 객이 된 지 몇십년 만에 이제 비로소 거처로 돌아오니 어느덧 우리 강호의 터가 되었다. 월악산 한자락이 마디마디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며 호숫가에 솟았다가 노기를 가라앉히고 형국(形局)을 여니, 마치 활을 반달처럼 잡아당긴 듯하다. 남쪽으로는 옥홀(玉 笏)이 하늘에 꽂힌 듯, 북쪽으로는 물과 구름이 병풍처럼 에워싼듯, 동쪽으로는 홰나무 버드나무가 봄을 알리고 서쪽으로는 기장과 피가 가을을 알리니, 우리 자손이 번성할 곳에 터를 잡은 것이다.
집 뒤에서는 활쏘기를 익히고, 집 앞에는 띠집을 지어 어린이들을 이끄니, 문호 (門戶)에서 바라는 것은 오직 네 가지 일일 뿐이다. 즉 의롭게 임금을 섬기고, 유순하게 부모님을 봉양하며, 배워서 유가(儒家)를 이루고, 활쏘기로 육예(六 藝)에 통달한다면, 출입에 있어서도 괜찮고 치란(治亂)에 있어서도 괜찮으니, 이밖에 무엇을 구하랴? 네 가지 바람이 갖추어졌는데 또 한 가지 바람이 있으니, 이 정자가 길이 보존되어 평호(平湖)의 물과 그 세월을 함께 하는 것이다. 대저 ‘ 망호’로 나의 정자 이름을 짓고 아래와 같이 시를 짓는다.
經年營始就(경년영시취) 일년 넘게 경영하여 비로소 이루었으니, 卜此地靈雄(복차지영웅) 터 잡은 이 땅은 영험하고 웅장하여라 開門迎秀子(개문영수자) 문을 열어 수재를 맞이하니, 鄕學會南東(향학회남동) 마을 학동들 남쪽 동쪽에서 모여드네.
경신년(1680) 국화꽃 핀 가을 9월 하한(下)에, 주인 이주남(李南)이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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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諸山 祖于白頭 透海三千里 中而爲金剛智異 結尾于月岳 巖巖乎金芙玉骨 霜

精毓靈 濱海出霄 南通瀛洲 北接長城 前有百里平湖 爲衿爲帶 山雄水麗之間 得無

億萬年怪秘之勝耶□ 吾李 自東庵益齋以後 文學相禪 冠冕繼世 在明宗乙巳 曾王

父湖巖公 戒于懲毖 自高陽地三遷 至南隱于月岳下鹿門 王考月齋公 當執徐之難

倡義戰殉 吾家世德 忠孝文武而已 以舊居之福隘 思欲搬移 抱琴爲客幾十年 今始

來居 居然我江湖爲址也 月山一支 節節起伏 出湖上 而息怒開局 如彎弓半月 南而

玉笏揷天 北而水雲繞屛 東而槐柳報春 西而黍稷登秋 植吾子姓卜合龜食 屋後習射

屋前築茅 導率群蒙 門戶之望 惟四事耳 義而事君 順而養親 學而成儒 弓而通藝 則

出入可矣 治亂可矣 此外何求□ 四望備矣 而又有一望者 斯亭之永壽 與平湖水同其

歲月也 夫以望湖名吾亭 詩曰

經年營始就 卜此地靈雄

開門迎秀子 鄕學會南東

歲在庚申菊秋下澣 主人 李注南 記


망호정은 일 년이 넘는 기간을 통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주남은 망호정을 세운 뜻으로 네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중 특별한 것은 활쏘기로 육예에 통달하는 것이다.
육예(六藝)는 《주례(周禮)》에서 이르는 여섯 가지 기예를 가리키는 말로 예(禮), 악( 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이다. 이주남은 여기서 사(射)를 명확히 하여 활쏘기를 장려하였다.


이런 내용은 1697년 이송제(李松齊, 1648~1733)가 지은 <望湖亭記後(망호정기후)>에 명확히 드러난다. 42


......(전략) 마을 이름을 정자 이름으로 한 것은 그 처음을 적어 보자면, 옛날 우리 재종대부(再從大父) 호군공(護軍公)께서 녹문(鹿門)에서 이주해 오셔서 호숫가 공터에 거처를 정하시고 그 당(堂)을 ‘망호정(望湖亭)’이라고 명명하셨고, 3년 사이에 따르는 자들이 촌락을 이루니 이로 인하여 당의 이름으로 촌락의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자제를 모아 후원에서 사례(射禮)를 익히게 하고서 그곳을 ‘사정치(射亭峙)’라고 이름을 붙이셨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시자 문학(文學)에 뜻을 두고서 별도로 정사(精舍)를 지어 ‘망호재(望湖齋)’라고 이름을 붙이셨다. 이웃 마을 사람들을 모아 그들과 더불어 강학한 것이 40년이 되자 성취한 사람이 많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문무병용(文武幷用)의 땅이라는 것이다.
터를 잡은 지 30년 만에 공의 아들과 사위 등 세 명이 과거에 급제하여 목하( 下)의 기쁨을 제공하였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공께서 말씀하시기를, “ 내가 ‘망’으로 정자의 이름을 지은 것은 내 바람을 이루고자 해서이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글을 배우면 그 자질을 성취하기를 바라고 무(武)를 배우면 그재주를 성취하기를 바라며, 임금을 섬기면 충성하기를 바라고 어버이를 섬기면

1736812729.4638BHIUQkBZKfimage.png 효도하기를 바라니, 이로써 제반의 일마다 모두 성공하길 바란 것이다.”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듣고서 후대 사람들이 단지 그 명칭만을 알고 그 뜻이 있음을 알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에, 감히 듣고 아는 바를 기록한다.
정축년(1697) 2월 하한(下潮)에, 재종손 생원 송제(松齊)가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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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村以亭名 識其始也 昔我再從大父護軍公 移自鹿 門 典居于湖上空地 而名其堂曰望湖亭 三年間從者成村 因以 堂名名村 聚村人子弟 習射後圃 而名其地日射亭峙 及其知命 之年 有志文學 別構精舍 而名曰望湖齋 聚呤里之人 而與之 講學者四十年 多有成就之人 眞所謂文武幷用之地也 卜居三 十年 公之子與娟三登科籍 以供目下之歡 豈不偉哉□ 公曰 吾 以望名亭者 欲其成吾望也 居是村者 學文則望其成材 學武則 望其成技 事君則望其忠 事親則望其孝 以至諸般事事 皆望其 成矣 余聞是言 恐後之人徒知其名之稱 而不知其意之在 故敢 記所聞以識.歲在丁丑仲春下澣 再從孫 生員 松齊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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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촌이정명 식기시야 석아재종대부호군공 이자록문 전거우호상공지 이명기당왈망호정 삼년간종자성촌 인이당명명촌 취촌인자제 습사후포 이명기지일사정치 급기지명지년 유지문학 별구정사 이명왈망호재 취령리지인 이여지강학자사십년 다유성취지인 진소위문무병용지지야 복거삼십년 공지자여연삼등과적 이공목하지환 개불위재□ 공왈 오이망명정자 욕기성오망야 거시촌자 학문칙망기성재 학무칙망기성기 사군칙망기충 사친칙망기효 이지제반사사 개망기성의 여문시언 공후지인도지기명지칭 이부지기의지재 고감기소문이식 세재정축중춘하한 재종손 생원 송제 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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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망호정 옆에는 호수가 있었으며, 정자를 중심으로 촌락을 이루니 정자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망호정 세운 뜻을 이어받은 사정치(射亭峙)를 하였고, 망호재(望湖齋)를 별도로 세워서 문무를 함께 가르치니 40년 후에는 성공한 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이 글을 쓴 이송제(李松齊)는 이의규( 李義奎)의 아들이며, 자는 수부(秀夫)이고, 호(號)는 죽암(竹菴)이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영암에 있을 때 망호정마을 생원 이송제가 보여준 전각첩을 보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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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망호정 옆에는 호수가 있었으며, 정자를 중심으로 촌락을 이루니 정자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망호정 세운 뜻을 이어받은 사정치(射亭峙)를 하였고, 망호재(望湖齋)를 별도로 세워서 문무를 함께 가르치니 40년 후에는 성공한 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이 글을 쓴 이송제(李松齊)는 이의규( 李義奎)의 아들이며, 자는 수부(秀夫)이고, 호(號)는 죽암(竹菴)이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영암에 있을 때 망호정마을 생원 이송제가 보여준 전각첩을 보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43

<題李生松齊篆章帖(제이생송제전장첩)-이송제의 전각첩에 쓰다>

......(전략) 이번에 낭주(朗州 전라도 영암)에 오니 이생 송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 자주 만나다가 그가 이 재주에 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소매에 이 첩을

넣고 와 보여주었는데, 모두가 손수 판 것으로 하나하나가 정묘하여 오늘날 보기

드문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무척 아끼고 좋아한 데다가, 또한 두 사람의 기호가

같은 것이 기뻐서 이 글을 써서 돌려보낸다. 그렇지만 이생이 우두커니 지내는

것보다 나은 이 일을 한갓 능사로만 생각하지 말고, 더 나아가 마음 써야 할 곳을

알아 진척이 있게 된다면 바람직하리라. 이 생원은 힘쓸지어다.


......(전략) 今來朗州 有李生松齊數相從 因知其善於斯藝 一日袖示此帖 皆其手刻

箇箇精妙 今世所罕見也 余旣愛玩之不足 且喜其同好 書此以歸之 然李生不徒以賢

乎 己爲能 而又能知所用心而有進焉則幾矣 李生勉乎哉

(금래낭주  유이생송제수상종  인지기선어사예  일일수시차첩  개기수각  개개정묘

금세소한견야  여기애완지부족  차희기동호  서차이귀지  연이생불도이현호  기위능

이우능지소용심이유진언칙기의 이생면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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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김수항이 말하는 이 재주란 전각(篆刻)을 의미한다. 김수항은 전각을 좋아하였기에 이송제의 재주를 크게 칭찬하였다. 이송제는 김수항을 많이 존경했던 듯하다. 1678년 9월에 김수항이 강원도 철원으로 이배(移配)되고, 아마도 이듬해 이송제가 김수항을 찾아 철원에 방문한다. 이에 김수항은 <朗州李生松齊來訪 臨別書贈 以謝其勤(낭주이생송제래방 임별서증 이사기근)-낭주의 이생 송제가 찾아왔는데 이별에 임해 시를 써 주며, 그의 노고에 감사해 하다>는 글을 남긴다. 44


竹村分袂夢依然(죽촌분몌몽의연) 죽촌에서 헤어진 게 꿈처럼 아련하니

誰料相尋到鐵圓(수료상심도철원) 누가 철원까지 찾아올 줄 생각했으랴

今夜與君同見月(금야여군동견월) 오늘밤 그대와 함께 달을 바라보니

却疑身在月山前(각의신재월산전) 이 몸 도로 월출산 앞에 있는가 싶네


여기서 김수항은 죽촌(竹村)과 월산(月山)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죽촌은 망호정마을을 의미하고, 월산은 월출산을 의미한 듯하다. 당시 망호정마을에 거주하는 경주이씨들은 주변에 대나무밭을 조성하여 참빗을 만들고 있었다. 참빗은 대단한 손재주를 필요로한다. 이송제가 전장첩(篆章帖)을 만든 재주와 참빗 만든 재주는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의 호(號)가 죽암(竹菴)이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송제(李松齊, 1648~1733)와 비슷한 연배인 이정빈(李廷彬, 1645~1727)은 참빗 재료를 얻기 위해 대밭 조성에 힘을 쏟았으며, 이에 죽와(竹洼)라는 호(號)를 얻었다.


망호정마을 입구에는 185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진사를 지낸 취벽(醉碧) 이규호 (李圭浩, 1821~1890)가 이곳에 들릴 때 말에 오르고 내릴 때 사용한 하마석과 이규호의 유허비가 서 있다.


1789년에 영암군수로 부임한 박명구(朴命球, 1731~?)는 1791년 5월 망호정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水迪波瀾定(수적파란정) 물은 멀고 파도는 잔잔한데

山當氣勢雄(산당기세웅) 마주한 산의 기세 웅장하구나

摠爲主人有(총위주인유) 모두가 주인을 위해 있는 것이니

終日倚欄東(종일의난동) 종일토록 동쪽 난간에 기대네


박명구 군수의 시를 그의 친구인 신문현(愼文顯)이 차운하였다. 45


主人益齋後(주인익재후) 주인은 익재(益齋, 이제현)의 후손이요

詞伯朗州雄(사백낭주웅) 사백(詞伯, 시인)은 낭주(朗州, 영암)에서 최고라네

共醉名亭會(공취명정회) 이름난 정자에서 모여 함께 취하니

風流壇海東(풍류단해동) 풍류는 해동에서 제일이라네


한참 세월이 흘러 1850년 9월 경주이씨 후손인 이규호(李圭浩)가 달밤에 망호정에 올라 이시를 다시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다. 46


源出蓬萊下(원출봉래하) 원천이 봉래 아래에서 솟아나

榮廻州勢雄(영회주세웅) 고을을 굽이도는 기세 웅장하네

望湖亭上月(망호정상월) 망호정 위에 달 떠오르자

却忘水西東(각망수서동) 도리어 물이 흐르는 것을 잊었네


이규호는 1850년에 증광시에 합격하고, 1885년에 태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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