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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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누정

간죽정(間竹亭)

설명요약
구림 함양박씨의 담락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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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건자 : 박성건(朴成乾, 1414∼1487)
• 창건시기 : 1479년 창건/1571년 중수/1768년 중수/1899년 중수/1969년 중건
• 위치 : 군서면 죽정서원길 19



도갑산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은 도갑사 앞에 모여 개울을 이루고, 도갑저수지에
잠시 머물렀다가 구림마을을 지나 상대포에 이르고, 이곳에서 먼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구림마을은 마을 북쪽 낮은 구릉으로 빙 둘러싸여 있다. 동쪽 죽정마을에서 시작해서 서쪽
서호정마을까지 북쪽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 띠를 이루고 있고, 그 구릉 안쪽으로
100여 미터 남쪽으로 군서천이 나란히 흐르고 있다. 군서천이 서쪽 상대포로 빠져나가기
직전에 많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상대포 바로 옆 구릉 위에 호은정이 있고, 상류로 200
여 미터 좌우에는 노송이 우거진 숲이 있고, 이곳에 군서천 좌우에 회사정과 총취정이
마주하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약 100여 미터 상류 좌측에 죽림정이 있고, 그곳에서 100여
미터 더 올라가면 좌측에 간죽정이 있다.
회사정은 선산인 구암(龜巖) 임호(林浩, 1522~1592)가 마을 주민과 함께 세웠으며,
간죽정은 함양박씨, 죽림정은 연주현씨, 호은정은 낭주최씨, 총취정은 창녕조씨가 세운
것으로 구림마을을 대표하는 성씨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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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죽정은 오한(五恨) 박성건(朴成乾, 1414∼1487)이 147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7년간
공직에 머물러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시를 읊고 글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려 지은 정자이다. 박성건은 함양인(咸陽人)으로, 자(字)는 양종(陽宗), 호(號)는 오한
(五恨)이다. 증조부(曾祖父)는 박계원(朴季元)이고, 조부(祖父)는 박사경(朴思敬)이고, 부
(父)는 박언(朴彦)이다. 관직은 훈도(訓導)를 거쳐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후진을 기르는
일을 좋아해서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귀향하여 영암의 구림에서 소요(逍遙)하며 문장을
짓고 도학(道學)을 하며 세상을 벗어나서 살았다. 그는 이 정자에서 인근의 향사(鄕士)들을
교육하였다.
간죽정은 기록상으로 영암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중의 하나이다. 영암의 누정을 기록한
여러 문헌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정자 또한 간죽정이다. 그만큼 간죽정이 차지하는 역사적
중요성이 크다는 의미이다.
간죽정은 죽정서원의 서쪽 끝, 군서천이 내려 보이는 나즈막한 둔덕 위에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대숲이 북풍을 막아주고, 좌측으로는 죽정서원이 한눈에 들어오고,
우측으로는 군서천이 내려다 보이고, 앞으로는 멀리 월출산 노적봉을 향하고 있다.
간죽정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기에 지금의 형태를 갖추기까지의
시대적 변화를 추적하기란 쉽지 않다. 주초석은 반구형으로 다듬어 엎어놓은 화강암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세 자 가량의 원기둥석주를 끼어놓았다. 두 개의 주초석은 전체
기둥의 절반 높이를 차지함으로써 비바람으로부터 목조 원기둥을 보호하고 있다. 정자
마루는 아래 반구형 주초석 위에 걸치듯 놓여으며, 새로 놓은 것이다.
현재 간죽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개방된 마루 형태이며, 골기와를 이은 팔작지붕을 갖고
있다. 전체 10개의 기둥 위에는 창방과 보아지를 올리고 주두 위에 대들보, 장여, 도리를
올렸다. 창방과 장여 사이에는 소로를 넣었으며, 보아지에는 안팎으로 연꽃문양을 새겼다.


전체 구조는 오량가구 형태이며 종보 받침은 주두와 초익공 형태로 소로를 올려
중도리받침장여와 종보를 떠받치고 있다. 종도리는 일반적인 판대공으로 마무리 했다.
<間竹亭沿革碑銘(간죽정연혁비명)>에 따르면 간죽정의 중수는 선조 신미년(1571),영조
무자년(1768), 고종 기해년(1899), 대한민국 기유년(1969)에 각각 이루어졌으며, 이 때마다
박필헌(朴弼憲), 박양직(朴良直), 송병선(宋秉璿), 박찬욱(朴燦郁)이 차례로 중수기를
지었다고 한다. 정내에는 송병찬, 박찬욱의 중수기가 현판에 새겨져 보존되어 있다.
재사당(再思堂) 이원(李黿, ?∼1504)이 작성한 <間竹亭記(간죽정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양살이 중에 병을 앓느라 오랫동안 붓을 들지 못하였다. 하루는 나의 벗 박이경
원님이 나에게 손수 쓴 편지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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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인께서 거처하던 집이 영암현 서쪽 이십 리쯤에 있네. 앞에는 덕진의
넘실대는 소주가 있고, 뒤에는 월출의 기이한 봉우리들이 둘러 있으며, 중간에 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네. 물의 근원은 도갑사의 골짜기에서 나오고 있네. 구슬처럼
뛰는 물결은 여울을 이루고, 고이고 쌓이던 곳은 못이 되어, 돌고 돌아 일백 구비나
꺾이어 길게 흘러 서쪽으로 가고 있네. 또 월출산의 북쪽으로 나온 기슭이 길게
연결되어 봉우리들이 모여 주먹처럼, 사마귀처럼 집의 동쪽 모퉁이에 솟아 있네.
정자는 대나무 사이에 있으며 대나무는 소나무 사이에 있으니 우러러보면 천기가
저절로 움직이며, 굽어보면 연못에 노는 고기들을 셀 수 있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신승 도선의 옛터라고 한다네. 선인이 있어 여기에 살으셨네. 가시덤불과
우거진 대나무 등을 비어 내고, 그곳의 옛터를 넓혀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
간죽정’이라 하였으며 호를 오한거사라 하였네. 정자에서 시를 읊으며, 장차
세상을 마치려던 뜻이 있었네. 뒤늦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을 좋아하지
않아 폭건을 쓰고 남쪽으로 돌아와 자기의 뜻대로 사셨네. 그렇게 하다가 오래지
않아 선인이 세상을 버렸으며 정자도 또 따라서 훼손되었으니 오호 슬프도다. 내
또한 과거에 마음을 두었기에 이 정자를 수리하는 여가가 없었으며, 무오(1498
년) 연산 4년에 나라에 죄를 지어 하경도로 유배되었으니 홀로 계신 어머님의
외로움을 누가 위문하였으랴. 다행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전리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계시던 곳은 옛 그대로이고, 어머니 모습은 변하지 않았네. 고향의
집을 돌아다보니 선인의 손길들이 아직도 남아있다네. 애모의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네. 더구나 이 정자는 선인이 손수 지었으며, 아침과 저녁으로 시를 읊던
곳이고 보면 그분의 손길이 남아있으니 상재에 비하여 만 배일 뿐이겠는가. 내가
이제 옛터를 새롭게 하여 뒷날까지 오래도록 전하게 하여 선인의 뜻을 따르고자
하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그 앞뒤 사실을 자세하게 적어서 애모의 정을 기록해
주지 않으려는가”
그래서 나는 단정히 앉아 편지를 펴보고 눈물이 흐르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두세
번이나 읽었다. 슬프다. 궁색스럽거나 영달하는 일이야 운명에 달렸으며 부와
귀는 하늘에 있다. 사람들이 출세하고 출세하지 못함은 시운이며 도를 닦느냐,
닦지 못하느냐는 자기에게 달려 있다. 이런 이유로 군자는 저쪽에 있는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에 있는 덕성을 구하며, 하늘에 있는 부귀를 구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성명을 다해야 한다. 궁색스럽거나 영달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며 부귀로써 자신의 지조를 두 가지로 하지 않는다. 저들이
벼슬한다면 나는 나의 인(仁)으로써 대하고 저들이 부하게 되면 나는 나의 의
(義)로써 대하니 내가 왜 저들에게 부끄러워하랴. 자신의 마음을 다할 뿐이다.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높은 벼슬을 진흙처럼 여기며 산수를 즐기는 마음을
완전히 지니고, 인지의 지혜를 발휘하였다. 동정이 기틀을 온전히 해야 하며, 모든
조화의 근원에 통달하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면서 한세상의 복판에서
소요한다면 이런 것들을 궁색스럽다고 하겠는가, 아니면 영달했다고 하겠는가.
선생이 스스로 지은 운(云)을 보자.


동쪽으로 죽정에 눕고 서쪽에서 뱃놀이하고
남쪽 시내에 발을 씻고 북쪽 동산에 노니네
평생에 호탕하여 얽매이지 않은 뜻은
동서남북에 멋대로 다녔었네
......(후략)
謫裏多病 久廢擧筆 一日 吾友朴侯而經 手簡抵余曰 吾先人弊廬 在靈巖治西二十
里許 前對德津壯潮 後對月出奇峯 中有一溪 源出道岬 跳珠成灘 渟滀爲淵 盤旋百
折 逶迤而西 又有月出北條 連絡凝聚 如拳如疣 聳於家之東隅 亭間於竹 竹間於松
仰觀而天機自動 俯臨而游魚可數 傳云 神僧道詵之舊址也 吾舅朴君彬 始卜築于玆
先君繼之仍家焉 翦荊斬竹 廣其舊址 以搆小亭 扁其名曰間竹 自號五恨居士 吟詠
其間 有若將終身之意 晩捷科第 蹇躓利途 幅巾南還 隨意自適 未幾 先人去世 亭又
隨而毀矣 嗚呼痛哉 余亦留心擧業 未暇修葺 盜名桂籍 患失利祿之間者有年矣 歲
戊午 獲罪朝廷 流落關北 孤親在堂 隻影誰弔 幸蒙聖恩 得還田里 萱堂依舊 慈顏不
改 顧瞻桑梓 先君之手澤尙存 則哀慕之心 可勝言哉 況是亭 先君之所親搆 而朝夕
吟詠之處 則其於手澤之存 比之桑梓 不啻萬萬 余方謀新舊址 以壽其後 欲追先人
之志 子盍爲我詳其顚末 以記余哀慕之情乎 余端坐披閱 讀之再三 不覺其涕之零也
嗟呼 窮達有命 富貴在天 人之遇不遇 時也 道之修不修 在己 是故 君子不求在彼之
人爵 而求吾心之天爵 不求在天之富貴 而盡吾心之性命 不以窮達而易其心 不以富
貴而貳其操 彼以其爵 我以吾仁 彼以其富 我以吾義 吾何慊於彼哉 盡吾心而已 浮
雲富貴 泥塗軒冕 窮山水之樂 盡仁智之用 專動靜之機 達萬化之原 俯仰乾坤之內
逍遙一世之上 則可謂窮乎 可謂達乎 觀先生自詠云 東臥竹亭西泛舟 南溪濯足北園
遊 平生浩蕩不羈志 南北東西任去留......
(적리다병 구폐거필 일일 오우박후이경 수간저여왈 오선인폐려 재영암치서이십리허
전대덕진장조 후대월출기봉 중유일계 원출도갑 도주성탄 정축위연 반선백절 위이이서
우유월출북조 련락응취 여권여우 용어가지동우 정간어죽 죽간어송 앙관이천기자동
부림이유어가수 전운 신승도선지구지야 오구박군빈 시복축우자 선군계지잉가언 전형참죽
광기구지 이구소정 편기명왈간죽 자호오한거사 음영기간 유약장종신지의 만첩과제
건지이도 폭건남환 수의자적 미기 선인거세 정우수이훼의 오호통재 여역류심거업 미가수즙
도명계적 환실이록지간자유년의 세무오 획죄조정 류락관북 고친재당 척영수조 행몽성은
득환전리 훤당의구 자안불개 고첨상재 선군지수택상존 칙애모지심 가승언재 황시정
선군지소친구 이조석음영지처 칙기어수택지존 비지상재 불시만만 여방모신구지 이수기후
욕추선인지지 자합위아상기전말 이기여애모지정호 여단좌피열 독지재삼 불각기체지령야
차호 궁달유명 부귀재천 인지우불우 시야 도지수불수 재기 시고 군자불구재피지인작
이구오심지천작 불구재천지부귀 이진오심지성명 불이궁달이역기심 불이부귀이이기조
피이기작 아이오인 피이기부 아이오의 오하겸어피재 진오심이이 부운부귀 니도헌면
궁산수지악 진인지지용 전동정지기 달만화지원 부앙건곤지내 소요일세지상 칙가위궁호
가위달호 관선생자영운 동와죽정서범주 남계탁족북원유 평생호탕불기지 남북동서임거류)

이원의 <間竹亭記(간죽정기)>에는 박성건의 <觀先生自詠云(관선생자영운)>이 소개되어
있다. 이 시는 1793년에 발행된 『靈巖邑誌(영암읍지)』3 에 박성건의 시로 소개되어
있으며, 1955년에 발행된 『湖南樓旌總覽(호남누정총람)』에 간죽정 원운시로 소개되어
있다.4
<間竹亭記(간죽정기)>를 쓴 이원은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낭옹(浪
翁), 호(號)는 재사당(再思堂)이다. 1480년에 진사가 되고, 14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으며, 그 뒤 호조좌랑을 거쳐 봉상시에 재직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로 인하여
곽산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다시 나주로 이배(移配)되었는데 1504년 갑자사화로 참형
당하였고, 중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간죽정과의 인연은 1502년 나주 유배 당시 맺어졌다. <間竹亭記(간죽정기)>에 기술한
바와 같이 그의 벗 박이경 원님이 그에게 서신을 보내어 부탁해서 글을 쓴 것이다. 박이경은
간죽정을 세운 박성건의 아들로서 이름은 박권(朴權, 1465~1506)이며, 자(字)가 이경(而
經)이다. 149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은 정언(正言)에 이르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길성(吉城)으로 정배(定配)되었고, 1504년의 갑자사화에서는 해남으로 이배
(移配)되었다. 이때 <간죽정기>를 쓴 이원은 참형을 당했다. 벗의 죽음을 접한 박권의

슬픔이 오죽했을까. 박권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2년 후 친구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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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은 아버지 박성건, 조카 박규정과 함께 죽정서원(竹亭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이원(李
黿)은 나주의 영강사(榮江祠), 곽산의 월포사(月浦祠)에 배향되었다.
1899년에 대사헌을 역임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음독자살한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쓴 <間竹亭重修記(간죽정중수기)>에는 간죽정 주변의 풍경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5
간죽정은 낭주의 구림에 있으니 오한 박성건이 지은 정자다. 서호가 마주하고
월출산이 삼키려는 듯하며, 그 곁에는 물이 모여 못을 이루고, 곁에는 냇물이
소리 내며 흐른다. 어지럽게 꽃들이 피어 있고, 푸른 숲이 우거져서 뒤엉킨 채
햇볕을 가리고 있다. 사면은 빽빽한 대숲으로 둘려 있으니 대나무는 군자와 같은
점이 있으니, 그 절개를 보면 늠연(凜然)하게 외로이 서 있어서 그건 이른바 사어
(史魚)가 화살처럼 곧았음이 아닐는지, 그 내부를 보면 툭 트인 채 비어 있으니
그건 이른바 안자(顔子)의 있어도 없는 것처럼 하던 것이 아닐는지, 이 때문에
군자들이 대부분 대나무를 사랑했다. 더구나 이곳은 십만 장부(丈夫) 같은 굳고
밋밋한 대나무들이 빽빽이 진을 친 듯이 둘러서서 모시고 있는 것임에랴, 이러한
사이에 정자를 세웠음은 당연하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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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竹亭 在朗州之鳩林 五恨朴公成乾之所刱也 挹西湖 呑月岳 塘滀其側 溪㶁其表
紛紅駭綠 蓊葧蔥蒨 而四面環密竹 故名其亭焉 年久而不能無圮摧之慮 後昆重修新
之 噫 此其所以構堂也歟 往余南遊獲登 酒半憑目 煙霞翠靄 風韻團圝 令人忽滌塵
胃而灑爽 翛然喪其神而忘返矣 於是 主人執酌而言曰 吾祖當燕山朝 見其泯棼 棄
官南下 遂成一林菟裘 願乞一言而侈之 余斂衽曰 竹有似乎君子 視其節 凜然而孤
其所謂史魚如矢之直歟 視其貌 頎然而癯 其所謂夷齊首陽之餓歟 視其中 洞然而虛
其所謂顔子之有若無者歟 是以君子固多愛之 况此十萬丈夫 甲刃摐摐 密陣環侍者
乎 則先公之起亭於此閒宜矣 ......(후략)
(간죽정 재낭주지구림 오한박공성건지소창야 읍서호 탄월악 당축기측 계괵기표
분홍해록 옹발총천 이사면환밀죽 고명기정언 년구이불능무비최지려 후곤중수신지
희 차기소이구당야여 왕여남유획등 주반빙목 연하취애 풍운단란 영인홀척진위이쇄상
소연상기신이망반의 어시 주인집작이언왈 오조당연산조 견기민분 기관남하 수성일림토구
원걸일언이치지 여렴임왈 죽유사호군자 시기절 늠연이고 기소위사어여시지직여
시기모 기연이구 기소위이제수양지아여 시기중 동연이허 기소위안자지유약무자여
시이군자고다애지 황차십만장부 갑인창창 밀진환시자호 칙선공지기정어차한의의 ......)
구림마을은 20세기 초까지도 대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찬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죽정이라는 정자 이름도 빽빽이 들어찬 대나무 사이에 건립되었다는 의미로
지어진 듯하다.
죽정서원은 죽원(竹院)이라고도 불렀는데 구림 8경(八景)의 하나로 칭송되었다.
間竹亭東有竹院(간죽정동유죽원) 간죽정 동쪽으로 죽원이 있으니
霜風雪月萬竿靑(상풍설월만간청) 서리 바람 눈 내린 달에도 일만 간대 푸르구나
一堂三世開籩豆(일당삼세개변두) 한 감실에 삼대를 모셔 변두를 받드니
我祖祠前士割腥(아조사전사할성) 우리 선조 사당 앞에 선비들이 희생을 잡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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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삼세(三世)는 정자의 주인공이자 <錦城別曲(금성별곡)>을 지은 오한(五恨) 박성건
(朴成乾, 1418-1487)과 아들 고광(孤狂) 박권(朴權, 1465-1506), 수옹(壽翁) 박규정(朴奎
精, 1493-1580)을 지칭한다.
정내에는 박성건이 지은 경기체가 <錦城別曲(금성별곡)> 6장이 편액으로 걸려 있다. <錦
城別曲(금성별곡)>의 금성(錦城)은 전남 나주시의 옛 이름이다. 박성건이 금성 교수로 있던
성종 11년(1480)에 그의 생도 열 사람이 한꺼번에 과거의 소과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었다.
<錦城別曲(금성별곡)>은 이를 기뻐하여 부른 노래이다.
1장에서는 자연이 아름다운 나주 고을은 빼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곳임을 자랑하였다. 제
2장에서는 이 고장의 유생들이 향교를 중심으로 하여 일으킨 면학의 기풍을 찬양하였다. 제
3장에서는 당시의 나주 목사 김춘경(金春卿)과 박성건의 선정을 칭송하였다. 제4장에서는
작자의 교훈이 교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을 자랑하였다. 제5장에서는 이 고장의 유생
10명이 함께 급제한 것을 고을의 장하고 아름다운 일로써 칭송하고, 또한 나주의 벌족인
금성나씨 일문에서 6명이나 함께 급제한 영광을 노래하였다. 제6장에서는 급제를 축하하는
고을 잔치에서, 가무와 음주를 즐기면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 유생들을 칭찬하였다.6
금성별곡은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경기체가로 당시 사대부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아울러
형식상으로는 정격형에서 변격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을 보이는 작품이다.
낭주최씨 묵암(黙庵) 최진하(崔鎭河, 1600~1673)의 손자요,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던 신재(愼齋) 최두명(崔斗明, 1656~1726)이
간죽정에서 사월 초팔일에 읊은 오언절구가 있다.7
八日黃昏後(팔일황혼후) 초파일 황혼이 된 뒤
觀燈間竹亭(관등간죽정) 간죽정(間竹亭)에서 관등했네
醉後凊歌發(취후청가발) 취한 뒤 맑은 노래 부르니
望却鬢星星(망각빈성성) 문득 귀밑털 센 것도 잊었네
최두명은 구림에 살면서 이곳에 있는 여러 누정에 올라 즐겼을 것이다. 그는 죽림정과
회사정에서도 느낌을 담아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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