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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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누정

강정(江亭)

설명요약
광산인 시서 김선의 향기가 머문 곳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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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건자 : 김시간(金時暕)
• 창건시기 : 1645년
• 위치 : 덕진면 강정마을

강정(江亭)은 김시간(金時暕, 1607~1675)이 덕진면 금강리에 지어놓고 유유자적하던
곳이다. 그는 광산(光山) 김씨 26세손으로,
나주의 상호군(上護軍) 김부성(金富成)의 손자이며,
시서거사(市西居士) 김선(金璇, 1568~1642)의 둘째 아들이다.
김시간의 자(字)는 회보(晦甫)이며, 16살에 영암의 현건(玄健, 1572~1656)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효종(孝宗) 2년(1651)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으로
합격했으며, 자여도찰방(自餘道察訪)을 지냈다.
나주 출신이었던 그가 이곳 덕진에 들어와 터를 잡은 후
자자일촌하는 마을로 번창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정자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는 아버지가 터를 보고 나서 권하였다 한다.
김시간의 부인은 영암의 연주현씨로 처가 고향인 셈이다.
김시간의 아버지 김선은 학자겸 문인으로 명분과 대의를 지킨 유학자이다.
그는 1609년에 <五賢書院請額疏(오현서원청액소)>를 올려
나주의 금양서원(錦陽書院)이 경현서원(景賢書院)으로 사액을 받는데 앞장섰다.
또한 이듬해에는 도내 유림의 소두(疏頭)가되어 문묘의 동방오현(東方五賢)
배향을 위한 청오현종사소(請五賢從祀疏)를 주창하여 광해군의 허가를 받았다.
그는 유능한 시인으로 생전에 1,200여 수의 한시(漢詩)를 남겼다.
김선은 1615년 그의 나이 48세 때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에서 오락정(五樂亭)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그는 형제, 처자, 시와 술 그리고 거친 음식과 빈궁을 오락(五樂)으로
삼았다. 궁하면서도 의를 잃지 않는 것을 낙도(樂道)라 여겼다.
강정마을에 터를 두고 살고 있던 김시간은 나주 금성산 기슭에 사는
부친 김선을 찾아 아침 문안 인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아버지 식사 전에 나주에 도착해야 하니, 새벽같이 덕진을 출발하여
아버지에게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리고 돌아와 비로소 일을 시작하였다.
문안 인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치지 않았다. 김선은 환갑이 되던 해에
아들 김시간을 불러 자신의 영정 그림을 주고 앞으로는 덕진에 영정을 걸어두고
그곳에 아침 문안을 올리라 했다. 그 이후로 김시간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영정에 문안을 올렸다고 한다. 이 그림은 본래 김선의 나이 59세 때
첫째 아들 김시길(金時吉, 1598~1660)이 화상 이응하(李應夏, 1832~?)에게
의뢰하여 아버지의 영정을 그리게 한 것이다.
당시 이응하는 초상화로 이름을 날렸는데 잠시 나주에 머물고 있었다.
매일 한결같이 문안 오는 아들이 안쓰러워 김선은 둘째 아들에게 이 영정을 넘긴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시서 선생 영정은 나주의 큰집에 있지 않고, 영암 작은아들 집에 전하게 된
것이다.

강정마을에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문중 재실인 경모재(敬慕齋)가 있고,
그 뒤편에 시서영당(市西影堂)이 자리하고 있다.
김시간의 글씨는 영암 도갑사에 있는
<靈巖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영암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에서 볼 수 있다.
이 비문은 홍문관 교리 정두경(鄭斗卿)이 짓고, 성균진사 김비(金棐)가 글씨를 쓰고,
성균 진사 김시간(金時暕)이 전액을 썼다.
김시간의 강정을 찾은 사람 중에 제주인 양우전(梁禹甸, 1595~1672)이 있다.
그는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문인으로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5대손이다.
그는 가업을 잘 계승하여 호남 인사(人士)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1623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병자호란 이후에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화순 송석정(松石亭)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양우전이 김시간을 찾아와 교유한 정황이 영암에 사는 낭주인
묵암(默菴) 최진하(崔鎭河, 1600~1673)의 글에 남아있다.
칠언율시의 제목은 <聞梁甸之高臥江亭(문양전지고와강정)-
양전지가 높은 강정에 누운 걸 듣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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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閣浮空絕世情(고각부공절세정) 높은 누각이 공중에 떠 세상 사정 끊어지니
客來惟有鶴傳聲(객래유유학전성) 손님이 오면 학이 전하는 소리 있네
天開水石留千古(천개수석류천고) 하늘은 수석(水石)을 열어 천고(千古)를 머물고
人得清區樂一生(인득청구락일생) 사람은 청구(淸區)를 얻어 일생을 즐기네
景物多般詩未盡(경물다반시미진) 경물(景物)은 많아서 시로 다하지 못하고
風烟爭態畫難成(풍연쟁태화난성) 풍연(風烟)은 자태를 다투니 그림 이루기 어렵네
塵緣挽我違仙賞(진연만아위선상) 진세 인연 나를 당기어 선상(仙賞)을 어기고
物外誰能記姓名(물외수능기성명) 물외(物外)에 누가 능히 성명을 기억할까
李白騎鯨返帝鄉(이백기경반제향) 이태백은 고래 타고 제향(帝鄕)으로 돌아가니
會稽誰伴賀知章(회계수반하지장) 회계(會稽)에선 누가 하지장(賀知章)과 짝이 될까
尊前皓月今猶古(존전호월금유고) 동이 앞에 흰 달은 지금도 옛날과 같고
湖上青山老不僵(호상청산로불강) 호수 위 푸른 산은 늙어도 엎드러지지 않네
竹葉夜深凋玉露(죽엽야심조옥로) 댓잎은 밤이 깊으니 맑은 이슬이 마르고
桂花風動散淸香(계화풍동산청향) 계수 꽃바람에 움직이니 맑은 향기 흩어지네
興來獨咏瓊琚句(흥래독영경거구) 흥이 나면 홀로 구슬 같은 시구 읊고
鷗鷺多情近小床(구로다정근소상) 갈매기와 백로는 다정하게 정자 가까이 날아가네

전지(甸之)는 양우전의 자(字)이다.
여기서 글쓴이 최진하와 양우전, 김시간은 서로 친분이 두터웠던 듯하다.
최진하는 도봉서원(道峰書院)에서 수학하였으나 이괄(李适)의 난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낙향한 문인이고, 양우전과 김시간은 사마시를 합격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고 시골에서 진사로 남은 문인이다.
양우전이 이들과 교유하게 된 연유는 영암의 제주양씨 집성촌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김시진의 거처인 강정마을은 금성천을 사이로 금산마을과 마주하고 있다.
금산마을은 양유세(梁由世, 1489~1551)를 입향조로 하는 제주양씨가 세거한 마을이다.
그는 1489년 광주에서 태어나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금산마을에 터를 잡았다.
지금은 금산마을과 강정마을의 첫 자를 따서 금강이라 부르고 있다.
아마도 양우전은 이곳 금산마을의 제주양씨와 관련하여 이곳을 방문하면서 광산인
김시간과 친분을 쌓은 듯하다.
위의 글을 남긴 최진하(崔鎭河)는 낭주최씨(朗州崔氏)로 만년에 영암군 구림 서호에
초당 성취당(醒醉堂) 터를 잡아 유유자적하며
<憶晦甫(억회보)-김시간을 기억하며> 시를 읊었다.
山陰未放子猷船(산음미방자유선) 산음(山陰)에서 자유(子猷)의 배를 띄우지 못했는데
新月流光雪滿天(신월유광설만천) 오늘 달빛 속에 빛나는 눈이 하늘에 가득했네
舊日儀形今在目(구일의형금재목) 옛날의 의형(儀形)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니
何時相對一燈前(하시상대일등전) 어느 때 한 등불 앞에 상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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