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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월루(對月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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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월루(對月樓) • 창건시기 : 1650년 중건/1701년/1777년 증축/1845년 개건 • 위치 : 영암읍 동무리 樓(관덕루)를 庚寅年(경인년)하에 重建(중건)하였다 하니 初建(초건) 年號(연호) 는 어느 해인지 알지 못한다. 觀德樓(관덕루)가 이제 對月樓(대월루)가 되었으니, 對月樓(대월루)는 辛巳(신사, 1701년, 숙종 27)년에 改建(개건)되었고, 庚寅年 (경인년)부터 辛巳年(신사년)에 이르니 52年間(년간)이요, 또 丁酉年(정유년, 1777년 정종 1년)에 改建(개건)되었으니 辛巳年(신사년)으로부터 丁酉年(정유년) 까지 76년이요, 또 乙巳年(을사년 1845년 헌종 11년)에 改建(개건)되었으니 丁酉 年(정유년)으로부터 乙巳年(을사년)까지 86년이라, 順治(순치) 庚寅(경인, 1650) 년으로 부터 道光(도광) 乙巳(을사 1845)년에 이르니 합해서 196년이다”라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효종 1년(1650)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縹緲高樓對月岡(표묘고루대월강) 아득하게 높은 대월루가 월출산 구릉과 맞섰구나 雲意入簾書帶潤(운의입렴서대윤) 안개가 햇빛 사이로 스며드니 책에 습기가 차고 水光侵戶譚生凉(수광침호담생량) 시원한 바람에 대자리가 서늘하다 千絲祿柳依依影(천사록류의의영) 천의 실가지 푸른 버들 간들간들 萬朶紅蕖冉冉香(만타홍거염염향) 일만 송이 붉은 연꽃 어우러져 향기롭네 喜見太平眞氣像(희견태평진기상) 보기 좋구나 태평스런 참기운 이 기상 雨均前野麥初黃 (우균전야맥초황) 비는 밭과 들에 고루 뿌려 보리가 익어가네 白尺樓頭萬二崗(백척루두만이강) 백척(白尺)의 다락 끝에는 일만이천의 봉우리로다 當戶靑山迎月出(당호청산영월출) 문과 마주한 청산(靑山)은 달을 맞아서 나오고 滿地紅藕引風凉(만지홍우인풍량) 못에 가득한 붉은 연꽃은 바람을 당기어 서늘하구나 松簧雨後看看密( 송황우후간간밀) 비 온 뒤의 솔숲은 볼수록 빽빽하고 橋柚秋來處處香(교유추래처처향) 가을이 오니 다리 옆 유자나무가 곳곳에 향기롭네 只向名區兼史隱(지향명구겸사은) 그저 이름난 곳에서 은자같은 관리로 지내니 槐將治積較龔黃(괴장치적교공황) 치적은 공수와 황패에 버금간다네 년에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680년에 영암군수에 부임했다. 그가 영암군수로 도임(到任)한 것은 경신년(1680) 2월이고, 체직(遞職)된 것은 동년 6월이다. 그는 불과 4 개월의 짧은 재직기간에 연꽃을 보았고, 가을까지 맞이하였으니 체직된 후에도 몇 개월 더 머물렀던 듯하다. 樓上平臨咫尺崗(루상평림지척강) 누각 위에 봉우리를 지척 사이로 바라보노라 恍若衣霑銀浦露(황약의점은포로) 옷이 은하의 이슬에 젖는 듯 황홀하기 그지없고 爽如身襲廣寒涼(상여신습광한량) 몸이 광한루의 바람을 쐬는 듯 상쾌하기 그지없도다 대월루에 관한 특별한 내용을 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1696)의 <辛酉日錄(신유일록)> 에서 찾아볼 수 있다. 29 가 나와서 맞았다. 이 고을 객관은 월출산(月出山) 천왕봉(天王峯)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데다, 뜰의 초목도 모두 그윽하고 기묘해서 달빛 아래 은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참으로 멋진 운치가 있었다. 객관 앞 대월루(對月樓)는 특히나 아름다워 촛불을 들고 올라가서 보고는 망설일 것도 없이 누대 위 작은 방에서 묵었는데 한밤중에야 잠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창을 열어젖히고 월출산 봉우리들이 옅은 안개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냈다 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그림 속 풍경 그대로였다. 다시 잠들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앉아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해가 뜨고 나서 군수가 찾아왔다 ....(후략) 亦皆幽奇 月下微見 儘有佳趣 客館前對月樓尤佳 張燭登覽 顧忘躊躇 仍宿樓上小 房 夜分乃寢 十三日 曉起拓窓 見月出諸峯 隱映於微霞淡靄之間 眞畫圖中境也 仍 <신유일록> 출처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GO_0432B_999_014_IMG 월하미견 진유가취 객관전대월누우가 장촉등람 고망주저 잉숙누상소방 야분내침 십삼일 효기탁창 견월출제봉 은영어미하담애지간 진화도중경야 잉복불매 청좌대조 일출후주졸출래.....) 부제학에 이어 참판에 이르렀다. 신유일록은 그가 1681년 호남에 시관(試官)으로 내려갔다가 음력 8월 1일부터 10월 18일까지 77일간의 여정으로 서울로 다시 돌아온 뒤까지의 일을 기록한 일지이다. ≪水村集(수촌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418A_A149_067L_IMG 雨色蒼茫風滿樓(우색창망풍만루) 창망한 비바람이 누대에 가득하고 海天涼意動新秋(해천량의동신추) 짙은 하늘 서늘한 기운이 초가을을 부르네 黃昏獨倚欄干立(황혼독의난간립) 황혼에 홀로 난간에 기대어 서니 滴瀝荷聲摠客愁(적력하성총객수) 마음속 울리는 그리움이 여운처럼 남는다 내가 젊은 시절에 해상으로 남쪽을 여행하다가 영암(靈巖)을 지날 적에 ‘대월루( 對月樓)’라는 곳에 올라가 보았다. 앞으로는 월출산이 나타나며, 비취빛으로 물든 절벽의 모습은 마치 한양의 삼각산(三角山)과 같았다. 천 리를 넘어 송옥이 초산을 만나듯이 오랫동안 마주하던 사람처럼 기뻤다. 그 후 몇십 년이 지나고 친구인 유군이 제주(濟州)를 나와 한 해도 안 되어서 글을 보내주었다. “대월루를 새롭게 확장하고 있습니다. 누(樓)는 상하층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15칸입니다. 아래층은 돌기둥들을 지탱하고 있으며, 높이는 2장 3척 정도이며, 장엄하고 화려하여 가히 최고라 하겠습니다. 제 아들이 한 말을 기록해 주시기 바랍니다.”부족한 나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유군에게 답장을 보낸다. “유 군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기리기 위해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웠을 것입니다. 모르는 이는 대월루가 작다고 조롱했지만, 유 군은 그것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본 것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북쪽의 도시를 지키면서도, 그가 사랑한 성벽과 성문을 그리워하며 돌아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월산과 유군의 존재를 글로 기록하여 대월루에서 바라보면 마치 자신이 거기에 올라가 있는 것처럼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유 군과 함께 산을 지적하고, 대월산이 어느 부분에서는 비슷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논하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 之三角山 去國千里 有宋玉楚山如故人之喜 其後數十年 友人兪君恒柱出宰是郡 未 一年書報不佞曰 對月樓今新而大之 樓上下層各十五間 下層皆以石柱 高二丈三尺 者承之 壯麗殆甲一路 幸吾子一言以記之 不佞聞卽大喜 以書復之曰 兪君之意 我 知之矣 其必愛月出山如不佞之昔所喜 而設此壯麗以志之也 不佞嘗嗤小其樓 而兪 君大之 何其所見之每同也 不佞方遠守北邑 係戀城闕 欲歸見三角而不得 得以文記 似三角之勝 揭之樓上 則怳如身陟斯樓 與兪君指點其山 論其似三角處不甚似處 榛 苓望美之思 黯然於其間 嗟呼 使不佞與兪君 推是心以往 愛君憂國之誠 奚間於在 金華玉堂時也 政思宣吾君之仁愛不敢怠也 刑思體吾君之欽恤不敢忽也 敎思布吾 君之德化不敢慢也 兪君之陟斯樓 亦同此想否 聞兪君之營此也 費俸錢累千金 苟以 是誇使客貯妓女 爲都會侈麗之觀而已 不志乎上所云者則謂兪君廉可也 謂兪君有 風流可也 謂得近臣出外之道則未也 以不佞所自勉者勉兪君可乎 不別爲記 君若有 取於吾書則盍以是編爲樓記 /艮翁先生文集卷之二十 / 記 거국천리 유송옥초산여고인지희 기후수십년 우인유군항주출재시군 미일년서보불녕왈 대월루금신이대지 누상하층각십오간 하층개이석주 고이장삼척자승지 장려태갑일로 행오자일언이기지 불녕문즉대희 이서복지왈 유군지의 아지지의 기필애월출산여불녕지석소희 이설차장례이지지야 불녕상치소기루 이유군대지 하기소견지매동야 불녕방원수북읍 계련성궐 욕귀견삼각이부득 득이문기사삼각지승 게지루상 칙황여신척사루 여유군지점기산 논기사삼각처불심사처 진령망미지사 암연어기간 차호 사불녕여유군 추시심이왕 애군우국지성 해간어재금화옥당시야 정사선오군지인애불감태야 형사체오군지흠휼불감홀야 교사포오군지덕화불감만야 유군지척사루 역동차상부 문유군지영차야 비봉전누천금 구이시과사객저기여 위도회치려지관이이 부지호상소운자칙위유군렴가야 위유군유풍류가야 위득근신출외지도칙미야 이불녕소자면자면유군가호 불별위기 군약유취어오서칙합이시편위루기 간옹선생문집권지이십 기) <간옹집(艮翁集)>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542A_A234_424L_IMG 대월루기를 쓴 이헌경(李獻慶, 1719~1791)의 지인이었던 유항주(兪恒柱)는 칠언율시를 통해 대월루 중수 사실을 그리고 있다.32 斯樓成毁赤鷄年(사루성훼적계년) 이 누정이 지어지고 헐린 것도 정유년이니 如月之中缺復圓(여월지중결복원) 달과 같이 이즈러졌다 둥글어졌다 하는 것처럼 木宿忽明朱鳥際(목숙홀명주조제) 목성이 문득 주조성의 곁에서 빛나니 銀梯欲揷素蟾邊(은제욕삽소섬변) 은 사닥다리를 달 가에 꽂고 싶네 丹靑隱映池塘影(단청은영지당영) 단청 고운 다락 그림자 못 속에 비치고 檻梅迷離橘釉烟(함매미리귤유연) 기둥과 석가래는 유자향기 그윽하네 太守今春來不晚(태수금춘래불만) 태수는 금년 봄도 늦지 않게 돌아오니 名因華構勝區傳(명인화구승구전) 이름이 아름다운 다락과 함께 명승지로 전하되 여기서 누정이 지어지고 헐린 것이 적계년(赤鷄年)이라 하였으니, 정유년(丁酉年)으로 1777년에 증축이 이루어진 듯하다. 유항주는 병신년(1776) 12월에 부임하여 무술년(1778) 3월까지 영암군수로 재직하였다. 증축된 대월루는 단청을 곱게 입혔고, 연못에 비친 모습이 아름다웠다 한다. 『靈巖邑誌(영암읍지)』에 수록된 신우상(申禹相, 1730~?)의 칠언율시를 통해 대월루의 흥취를 찾아본다. 高樓南郡幾多年(고루남군기다년) 높은 다락 남쪽 고을에서 얼마나 많은 해 지냈나 興廢泡謳滅復圓(흥폐포구멸복원) 흥폐는 물거품 같아 꺼졌다 둥굴어졌다 하는 것일세 山翠直臨朱棟外(산취직림주동외) 산의 푸른 빛이 바로 붉은 기둥에 비치니 月娥疑降畵欄邊(월아의강화란변) 월궁에 항아가 고운 난간에 나리듯 하구나 池塘暮濕千家雨(지당모습천가우) 천 채의 집에 내리는 저녁 비에 지당은 잠겨 있고 하니 槐柳輕籠萬井烟(괴류경롱만정연) 일만 마을 느티나무와 버들 연기에 자욱하네 悟帳主人今不在(오장주인금부재) 애달프다! 주인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고 一詩紅壁爲誰傳(일시홍벽위수전) 붉은 벽에 시 한 수는 누구를 위해 전하는가 신우상은 177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774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정조 11년(1787) 헌납(獻納), 1792년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1797년 사헌부집의(司憲府 執義)로 재직하면서 과거시험의 엄정을 기할 것을 주장하여 채택되었다. 그가 본 대월루는 붉은 기둥을 가진 단청 누각이었고, 주변에 느티나무와 버드나무가 있었던 듯하다. 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였던 이회재(二懷齋) 신사준(愼師浚, 1734~1796) 이 이곳에 오르고 읊은 시에서 일천 봉우리로 웅장한 월출산을 배경으로 멋진 대월루를 잘 표현하고 있다.33 兒郞一曲下車年(아랑일곡하거년) 아랑의 한 곡조가 함께 수레에 내린 해에 撲撲翬飛向月圓(박박휘비향월원) 순박하고 웅장한 모습은 달을 향하여 둥글었네 滕閣丹靑孤鶩外(등각단청고목외) 등왕각 아름다운 단청은 외로이 나는 따오기와 함께 岳樓憂樂暮猿邊 (악루우락모원변 ) 악양루 시름과 즐거움은 황혼에 슬픈 원숭이와 함께 窺簷隱隱千峯色(규첨은은천봉색) 그윽히 처마 끝으로는 일천 봉우리가 비치고 繞郭依依十里烟(요곽의의십리연) 성곽을 둘러 나부끼는 것은 십 리에 이어지는 연기로다 岸柳塘蓮添好景(안류당련첨호경) 언덕 버들과 못의 연꽃은 한층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는 風流太守事堪傳 (풍류태수사감전) 풍류를 즐기는 태수는 이 사실을 휼륭히 전해가겠다 月奈山高置郡雄(월나산고치군웅) 월나산이 높이 솟아 고을의 웅장한 기상이구나 更有危樓相對起(갱유위루상대기) 다시 놓은 다락이 있어 서로 마주 대하고 일어나니 錦筵淸夜座詩翁 (금연청야좌시옹) 맑은 밤 비단 자리에 시 짓는 늙은이 앉았구나 西臨滄海日邊留(서림창해일변유) 서쪽으로 임한 창해는 해 언저리에 머무네 今行壯觀無餘恨(금행장관무여한) 오늘 행보는 장관이라 여한은 없으나 只少逢君對月樓(지소봉군대월루) 오직 그대와 대월루에서 만나지 못했네 조선 시대 영암읍성에는 2개의 연못이 있었는데 작은 것은 서문 안쪽, 큰 것은 동문 안쪽에 있었다. 대월루는 큰 연못[蓮池] 옆에 있었는데, 현재 지도상으로 군청 앞 주차장 일부와 영암농협 주차장 자리로 추정된다. 1872년에 제작된 영암 지도에는 대월루(對月樓)가 객사앞 누각으로 높은 기단이 있고, 앞에 연못이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