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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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 영암읍

일본 상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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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출정’이는 지금 군농협 앞쪽에서 버스 정류소를 했네. 여객버스 여섯 대에 트럭도 있었는디,‘전남자동차’라는 회사를 했어.‘남철’은 광주, 순천을 댕기고,‘신호대’는 목포, 영광을 댕겼네. 또 신문도 취급했는디‘대판조일’‘대교매일’‘경성일보’‘광주신보’‘목포일보’등 미제 그러고 잡화상도 하고, 면화사업도 하고,‘남방’이는 쌍정리에서 정미소를 하고, 지금 오거리 정신약국 자리에서 쌀장사, 석유장사를 했고,‘지상’이는 잡화상을 크게 하면서 상권을 잡았네. 또‘소리’도 정미소를 했네.
 해방 후에 하남O 씨가 인수 했어‘평전’이도 뱃마테에서 정미소를 하고, 그라고 막걸리는 사거리에서‘기목’이 술 도갯집을 했네. 농덕리‘정상’이는 농업을 크게 하고,‘병두’는‘동척회사’라고 봐야제. 신흥방죽을 만들고 간척사업을 하고 회문리 송평리 해창 쪽까지 농토가 많은 대지주였제.
 지금 중고등학교 자리에 뽕나무 밭을 하고 농장 재배인은 송모 씨가 했네. 지주들은 곡수를 챙겨 벌이가 좋았것제. 일반 사람들은 일본인과 언어소통이 잘 안 됐제.‘순사 온다’하면 애들이 무서워했어. 순사들이 구둣발질로 차고 무섭게 하고 다녔네.
 그때 영암서장을 한국 사람이 하기도 했는디, 구례에서 영암으로 왔다하드만. 한국사람 경찰서장은 아마 두 명이었을 것이네. 일본순사가 길에서 있으면 주위 백 미터는 피하고 조용해져 부렀네. 대동아 전장이 일어나 천구백사십삼 년부터 사오 년 정도 해방될 때까지 공출이 무지하게 심해서 묵고 살기가 징그럽게 어렵게 됐네.
“삼사 월 긴긴 해 점심 굶고 못 살고, 동지섣달 긴긴 밤에 이불 없이 잠 못 자고”하는 그런 신세 한탄 소리가 유행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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