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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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 덕진면

덕진포구 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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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육십 년 전, 단오 때면 모래찜하러 모여 들었던 모래밭 밥집 손자입니다. 제가 사는 곳은 제주양씨 집성촌으로, 이 마을에 양씨들은 고려 초에 처음 입성하여 살게 되었는데 조상님의 호가 금산이었기에 이 마을 이름이 금산마을이 된 것입니다. 사당은 제주 양씨 종가 조상을 모시는 금산사라 하고, 저 위 쪽의 당암마을도 그 후손이 금산마을을 떠나 새로 생긴 마을로 처음 입성한 조상의 호를 따서 당암부락이라 한 것입니다.
 덕진 나룻터 얘기를 하겠습니다. 덕진 사람은 깊고 커다란 강 때문에 피해도 많이 봤지만 다양한 해산물로 풍족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커다란 강이 있었던 탓에 논과 밭이 많지 않아 사람들은 바다에서 해산물을 잡아 생계를 꾸렸습니다. 한번 강에 나가면 숭어, 운저리, 장어, 제첩, 맛 등 다양한 해산물을 잡았습니다. 농경지가 많지 않아 농산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풍족한 해산물 덕분에 여느 마을보다 여유있는 삶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또 이곳 덕진포 나루터를 통해 쌀을 배에 싣고 목포로 이동해 그곳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서울 인천 등지로 물류교류 역할을 크게 하였습니다. 또한 신안의 섬 지방에서 잡힌 수산물은 덕진포구를 통해서 나주, 영산포, 강진, 영암 등 오일장에 내다 팔기도 했을 정도로 중요한 해상교통로가 됐던 곳입니다. 하지만 영산강 하구둑이 생기면서 우리 마을 사람들의 삶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커다란 강이 흘렀던 곳은 현재는 작은 하천으로 바뀌었고 그 주변은 논으로 바뀌어 쌀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영산강 하구둑이 생겨나기 전에 여기는 꽤나 넓은 모래사장이었습니다. 이 곳 모래사장은 옛날 어느 곱사가 이곳에서 모래찜질을 한 뒤 허리를 펴게 됐다고 하여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바닷물이 여기까지 드나들 때까지만 하더라도 단오절 무렵이면 나주, 강진 쪽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모래찜질을 즐겼으며 여름철 내내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영산강 하구둑이 생기고 바닷물이 드나들지 않게 되면서 현재는 모래사장은 사라지고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단오 때면 모래찜하는 인파들 사이에 심부름하는 포구밥집 손자가 바로 저였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나루터에서 밥집을 하셨고 음식 솜씨가 좋아서 손님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늦가을이 되면 신안의 여러 섬에서 생산한 건어물, 미역, 다시마, 말린 생선 등 을 가득 실은 배가 정박하고 우리 집 창고에 가득 저장하여 두고, 겨울과 봄 내내 어부들은 등짐을 지고 다니며 영암장, 영산포장, 나주장 등 인근 장터에 내다 팔러 다녔습니다. 다 팔고 배가 비워지면 다시 떠나곤 하였습니다. 가끔은 어린 나를 배에 태워 멀리 영산강 하구 목포까지 태워주곤 하였습니다.
 할머니께서 밥집을 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전답을 사서 지금까지 저에게 전해 주시었습니다. 영산강 하구언이 없었더라면 지금도 상당히 유명한 모래찜하는 유원지가 되었을 터인데 매우 아쉽습니다. 지금 덕진 강변엔 모래밭이 없습니다. 돌아보면 잡초만 우거진 잡종지가 되어 있습니다. 조개 잡는 처녀도 모래찜하는 인파도 없습니다. 고깃배도 소금배도 오지 않고 물새도 오지 않습니다. 영산강 개발로 강하구를 막아 논과 밭이 되고 만 까닭입니다.
 영산강 하구언으로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아 우리 마을은 손해가 많지요. 우리의 경제적 수입터전을 잃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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