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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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 신북면

서울 우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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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 우산각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디, 여그 출신 유관 선생이 거기 거주하면서 생긴 이름이여. 그란디 우산각이 있는 마을을 우산동이라 했다가 나중에 우선동이라 불렀어.
 유관 선생이 사는 우산각에는 날이면 날마다 유림들이 모여서 유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렸다고 했는디, 학문을 논의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잉. 그라고 하정 유관 선생은 외손으로 조선시대 실학파의 선구자라고 했던 지봉 이수광은 유관이 거주하던 집에서 하정 선생을 기리는 정자를 짓고‘비우당’이라는 현판을 달아서 후세에 전하고, 그 지역을 우산각 골이라고 불리게 되었당께.
 근디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행정구역을 허버 바꾸면서 숭신방과 근처에 있는 인창방을 반씩 쪼개서 창신동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머리글자만 합성해서 숭인동이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만들어 버렸당께, 그놈들이.
(조사자 : 일본인들이 침략해서 이름을 마음대로 바꿨다는 말이시죠? 혹시 왜 그랬을까요?)
 나도 들은 얘긴디, 그때 왜놈들이 우산각을 보고 도시계획을 해야 했다는디, 그 왜놈들이 흥인지문에서 길의 방향을 돌려서 도로를 뚫어버렸당께. 그래서 잉~ 우산각은 흔적조차 사라지게 됬당께. 알겠제. 시방 옛날 신설계의 이름을 따서 잉,‘새로운 마을이 설치되었다’라는 뜻처럼 신설정이라 한 것이 오늘의 신설동이랑께. 그라고 그 당시에 우리 신북에서 태어난 하정 유관을 기리기 위해 신북에 하정길이 생겼어라.
(조사자 : 여기서 큰 인물이 태어났는데요, 다른 인물이 더 있었을까요?)
 우리 마을이 부자정승마을 이랑께. 그것이 뭐냐믄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정승을 지냈다는 것이여. 약제상운이라고, 이조판서와 형조 판서를 지냈고,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내고 나서 영의정에 세 번이나 오른 인물이랑께! 그라고, 그 아들이 좌의정과 우의정을 보냈는디, 이름이 만암 봉휘여. 그라고도 지금까지 계속 높은 사람들이 많이 배출 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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