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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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 군서면

벼슬한 것을 후회하며 지은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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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고장에는 웬만한 마을이면 으레 정자가 하나씩 있지만 우리 동네에는 희한한 내력을 가진 정자가 있는디, 저기 마을 안쪽 절터가 있던 자리. 밭 언덕에 아담한 정자가 있는디, 그 정자 이름이 관해정이여. 한자로는 볼 관, 바다 해, 정자 정자로 바다를 관망하는 정자란 뜻인디, 그것이 본래 이름은 관해정이 아니고 후회할 회자를 써서 관회정이라 했어. 그러니까 한자로 볼 관에 후회할 회, 정자 정을 썼다는 얘기여, 그 뜻은 후회를 되돌아보는 정자라는 뜻이제.
(조사자 : 얼마나 오래된 정자인가요?)
 응 그것이 시방 있는 것은 얼마 오래 안 됐어. 한 오년 전에 영암군에서 다시 지었는디, 원래는 무지하게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어.
 지금부터 이백사십 년 전에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여경 박필각이라는 분이 있었는디. 이 분이 한양에서 이곳 백십오 번지 새 터에 정착한 다음 지은 것이어. 그 내력이 참 재미 있당께. 때는 조선 이십일대 영조대왕 시절이었는디, 영조 삼십일년인 천칠백오십오년에 나주에서 괴문서 사건이 생겼는디. 그것이 뭐였냐면, 영조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사도세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어.
 당시 조정은 노론파가 장악하고 있었는디, 그들은 영조를 추종하는 세력이었고, 소론파는 사도세자를 따르는 신진세력이었어. 그 괴문서가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론파는 이 괴문서 사건을 빌미로 소론파를 숙청하기 시작했지. 이때 여경 박필각 이라는 분이 이 사건에 휘말려서 노론파의 음모에 희생되어 천칠백육십일년 나주 남평으로 유배 오게 되었지.
 그런데 여경의 일가 되는 사헌부 대사헌 박도원과 영조의 다섯 번째 사위인 박명원이 임금에게 박필각의 무죄를 거듭 간언하여 팔 개월 만에 복직되었지. 이때는 그 유명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었을 때인디, 결국 굶어 죽고 말았는가. 여경 공은 그것을 보고 더 이상 이런 부덕한 임금을 섬기면서 관직에 연연한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고 관직을 사퇴하고 말았지. 팔도를 유랑하다 마침내 진암마을(지남마을)에 정착했는디, 그 해가 천칠백육십이년이었어. 여경공은 그 이듬해인 천칠백육십삼년에 정자를 짓고 관회정이라 이름 붙였지. 후회 스러운 일을 잊지 않고 돌아본다는 의미였겠지.
 그 후 정자가 오래돼서 유실되었는데 천팔백육십년 증손자인 박종식이 복원하였는디, 일제시대의 풍랑을 겪으면서 후손들이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훼손되어 쓰러져버렸고, 천구백오십년대 초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힘을 합하여 유선각을 지으면서 관해정이라 이름을 바꾸어 붙였어. 근디 그것도 운이 없었던지 이 유선각도 사라태풍 때 자빠지고 말았어. 후에 안경태라는 분이 이장을 할 당시 마을 돈 구십만 원을 들여 콘크리트로 정자를 맹그러서 역사를 보존하려 애 썼어. 그러다가 지난 이천십이년도에 군의 도움을 받아 한옥 목재 건물로 다시 지어서 지금에 오고 있어. 실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디 사람들이 모를까봐 내가 얘기한 것이여.
(조사자 : 복원 이전과 이후 모습을 기억하세요?)
 그라제. 지금 것이 훨씬 튼튼하고 좋제. 유선각은 기둥도 약하고 처마도 낮았고 마지막으로 있었던 콘크리트 정자는 뽀다구가 없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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