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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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 군서면

형님 살린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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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는 육이오 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 막내 삼촌이 스물이 갓 넘은 청년이었는데 우리 국군으로 자원 입대했다고 합디다. 그때는 제가 태어나기 전이라 삼촌 얼굴도 모르지요. 한 번은 삼촌이 휴가를 왔는데 말을 타고 왔다고 그래요. 부대로 복귀하는 날 어머니가 콩을 한 되 볶아서 드렸답니다. 가면서 까먹고 가라고. 그러고 얼마 후에 편지 한 장이 왔는디 삼촌이 전쟁터에 출정하면서 할머니와 부모님께 보낸 편지였어요. 그 내용이 참으로 비장했다고 해요.‘어머니, 형님, 저는 이제 싸우러 갑니다. 부디 안녕히 잘 계십시오. 아! 월출산아 잘 있거라. 내 고향 모정마을아 잘 있거라...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참 지혜가 있는 분이거든요. 어머니는 삼촌의 편지를 뒷마당 흙돌담에서 돌을 살짝 빼내고 그 안에다 넣어 감추어 놓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군들이 저기 낙동강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면서 대부분 지역이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고 말았지요. 어머니는 앞날을 미리 대비하셨던 게지요.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민군들이 퇴각하자 다시 군경이 진입해 들어왔는데 이때 군경은 각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인민군 부역자 색출 작업을 벌였습니다. 인민군들에게 물 한 잔 떠준 것 같고도 잡아갔다고 해요. 이때 우리 마을 젊은 사람들도 몇 명 잡혀갔는데 그 중에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나설 때 어머니가 급하게 흙돌담에서 꼼차 놓았던 삼촌의 편지를 꺼내왔어요.“여마리요, 이 편지를 꼭 챙겨가요”“그런 것이 먼 소용이 있간디. 냅두시요”“그래도 혹시 몰르요. 국군에 있는 동생 편지니까 도움이 안 되겄소?”어머니는 귀찮아하는 아버지를 달래면서 아버지 조끼 주머니에 삼촌의 편지를 넣어 드렸답니다.
그때 끌려간 사람들은 죄다 구림지서에 모여 조사를 받았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트럭에 태워져 월출산 골짜기로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고 해요. 아버지도 트럭에 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버지는 깐딱 잘못하다가는 목숨이 위태롭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다급해져서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하소연을 했어요.“여보시오. 나는 고향마을에서 부모님 모시고 부지런히 농사 지는 죄밖에 없소. 인민군들 편을 든 적이 없는 사람이오”그러자 돌아오는 것은 퉁명스런 대답이었어요.“거 쓸데없이 말이 많네. 조용히 좀 있어!”트럭이 곧 출발하려고 하자 아버지는 순간 어머니가 넣어준 삼촌의 편지가 생각났어요.“여보시요! 이것 좀 보시요. 내 막내 동생이 지금 국군에 입대하여 인민군과 싸우고 있소. 전장터에 가면서 보낸 편지가 이것이요. 국군 가족인데 내가 멋땀시 인민군 편을 들겠소?”그러자 이 책임자가 삼촌의 편지를 가져다 죽 읽더니“당신 빨리 내려서 집으로 가시오”하더랍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아버지는 트럭에서 뛰어내려 십 리가 넘는 거리를 달리다시피 해서 집에 왔습니다. 오는 도중에 뒤에서“당신 어디 가? 빨리 이리 안 와?”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했다고 합니다. 들길을 걸어오는데 발이 땅에 닿는 지 안 닿는 지 모를 정도였답니다. 집에 도착해서 방 문고리를 잡는 순간에도 금방 뒷목을 잡아챌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삼촌은 한강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셨습니다.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삼촌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셨지요. 하지만, 삼촌이 전쟁터로 가면서 보낸 마지막 편지는 형님을 살렸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이고요. 감사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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