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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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 미암면

경주 이씨 여근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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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리 비래산에 여근혈 명당이 있어라. 그 명당이 전국으로 소문이 나가지고 풍수지리 하는 사람들은 한 번씩 다녀간 곳인디. 산모양이 여자 궁뎅이 만이로 둥실 해가지고 꼭 그렇게 생겼어라.
 그 산중턱에는 묘가 있고 바로 아래 옹달샘이 있는디, 사시사철 물이 안 마르고 졸졸졸~ 흘러나오는데, 그야말로 여자 성기를 꼭 닮은 그런 음부형 명당자리여라.
 지금은 비래산에 숲이 우거져서 윤곽이 뚜렷하지 않고 보이지도 안은디, 그때는 볼 만 했제.
(조사자 : 그 자리에 묘를 쓴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그랑께 조선시대 때여라, 영암읍 경주 이씨들이 명당을 찾고 있었는디, 한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조상 묘를 쓰면 후손이 잘 된다고 항께, 그 자리에다 묘를 썼는디. 진짜로 후손들이 무과에도 급제하고, 선전관 벼슬도하고, 자손들이 날로 번창해 갔어라.
 인자 잘 나가다 본께 친족 간에 근친상간하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도 생기고 그랬어라. 양반가문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어따가 말도 못하고 겁나 챙피 하제 .
 그래서 문중에서 그런 일이 없게 해결 할라고, 다시 지관을 불러다가 물어본께, 그 지관 말이 선산 앞에 남자들이 들끓으면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고 가부렀어라.
 원래 옛날에는 비래산 앞이 바다 였는디, 일제 때 감치 간척사업 한다고 막아서 육지로 변한 곳이여. 그래서 지금 독천은 그 이후로 형성된 새로운 장터여. 본래 장터는 아천하고 용산 쪽에가 있었어라. 그때는 아천 포구가 있었제. 한석봉 어머니가 떡 장사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장터가 바로 아천 장터였어라.
 그래서 선산의 그런 문제들을 해결 할라고 문중에서는 힘을 써서 아천장을 독천으로 옮기는데 성공했어라. 독천장이 육이오 사변을 전후한 무렵에는 활기를 띄고 잘 나갔다고 하드라고. 요쪽 서남부권에서는 최고로 독천 우시장이 크고 잘 되았었어라. 그래서 송아지 독자와 내천 자를 써서 독천장이란 그런 이름이 생겼제.
 그렇게 빨리 독천장이 활성화 된 것은 강진 병영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여. 병영 상인들 덕분이제.
(조사자 : 병영 상인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라제 그 당시 동학혁명이 일어나서 병영성이 폐쇄되었는디, 병영 상인들이 독천장으로 몰려와서 커젔제.
 그 후로도 남대문이나 동대문 그라고 광주로도 진출해서 거상으로 발전했고, 그래서 독천장이 엄청 커져 부렀제. 그렇게 해서 경주이씨 문중에서는 장터를 만들어서 사람을 들끓게 하는데 성공을 했어라.
 비래산하고 마주보고 있는, 지금 동아인재대학교 맞은편 산이 남자산인 장정산이라고 했고, 여근혈 음기를 눌러줄라고 우시장 안에 엄청 큰 쇠말뚝을 박았는디. 지금도 그 말뚝이 남아있어라.
 그 후로는 경주이씨 집안에서는 더 이상 그런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라. 그라고 지금도 영암에서는 명망 있는 씨족으로 번성하고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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