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상은 있으나 없으나 다 배부르게 먹고 못 먹고 산 사람은 하나도 없는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우리 새끼들 생각하면 짠해 죽것어라. 자석들은 많고 배가 고픈디 셋젖도 못 주고 어떻게 칠 남매 자식들을 키웠는지 모르것어라. (조사자 : 셋젖이 무슨 말입니까?) 여름에 밭 메다가 세참 때, 그랑께 세 때 애기 젖 미기로 가야 쓴지 못 간께, 애기들이 얼마나 배 고파겄소, 옛날에는 죽석 자리라고 대나무 엮어서 만든 자리에다 눕혀 놓고 밭 메로 가제. 애기들 셋젖도 못주고 있다가 점심때 밥 먹으로 가면 애기가 얼마나 배가 고프면 …
우리 친정아버지가 농업박사 였는디, 그랑께 구장이었제. 지금 같으면 이장인디, 농사를 지으면 키가 질고 짧은 것이 하나도 없이 가세로 빤듯하게 짤라분 것 같다고 했어라. 그랑께 남편이 처갓집에 오면 항시 그 말을 했어라. 농업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님이 그 옛날부터 연구함시로 하다 농사를 잘 지은께, 주변 사람들이 농업 박사라고 했지라우. 그랑께 보리도 심거도 보고, 어뜬 놈이 많이 난가 볼라고 보리 모종을 부서갖고 앵게도 보고 뿌려도 보고, 또 모판에다가 모종을 부서도 보고, 모판도 이렇게 판때기에다가 이렇게…
옛날에는 참말로 어렵게 살았어라. 여그 가마골 처녀들이 시집갈 때까지 백미 서말을 못 먹을 정도로 가난했지라. 여그는 논이 없고 밭만 쬐금 있고, 앞에는 바다였는디, 하구둑 막은 뒤로 여 앞에 논이 생긴 것이어라. (조사자 : 가마골이라면 무슨 도자기나 기와 굽는 골자기가 있었어요?) 여그 은곡마을을 가마골이라 불러. 본래는 갈마골이었는디 그냥 가마골이라 해. 옛날에 어떤 사람이 여그서 말 물을 먹일라 했는데 물이 없어서“말에게 먹일 물도 없는 곳”이라 해서 갈마골이라고 했다해. 여그는 뒤에 은적산이 있는데도 희한하게 물이 귀해…
옛날에는 사는 게 참말로 얼척 없었어라. 도구통에 보쌀 갈아서 꺼먼 솥에다가 끓여 갖고, 쑥이랑 나물 섞어서 끓여 먹은 것은 다행이고, 고구마 삶아서 때우기가 일쑤였어. 쌀밥 먹을라 하면 조상 제사 때나 먹지, 평상시는 구경도 못 해. 부잣집도 쌀밥만 먹는 경우는 없어. 일 년 내내 풀만 먹었지, 고기는 통 못 먹었어. 그때는 일 년에 한 번이나 고기를 먹었어. 옛날에는 모내기가 젤 중요한 일인디, 모내기 할 때 써레질을 꼭 해야 해. 논을 편편하게 써레질을 해야 모를 심글 수 있어. 모내기가 끝나면 써레를 잘 씻어서 보관해야 된…
옛날에는 대사 치를 때 떡은 물론이고. 쌀강정 콩강정 엿 같은 것을 직접 만들었어라. 지금은 다들 사 먹지만, 집안 식구들 모다 모여서 손으로 직접 만든 거제. 산자 만들려면 찹쌀을 미리 한 댓 대 담가놓고, 술을 만들라면 빠르면 한 삼일 만에 딱 되야불제. 술밥을 고슬고슬하게 해서 항아리에 앉혀서 아랫목에 자리 잡고는 솜이불로 뜨뜻하게 덮어두는 거제. 그라면 술 익은 향기가 방안에 술~술 풍겨 나와. 그 술로 대사를 치는 거여. 그라고 옛날에는 술을 가정에서 못 담게 했어. 그래서 몰래 술을 담갔제. 정제에 고구마 굴을 파고 …
여그 화산부락에 육이오 전쟁당시 경찰가족이 있었는디, 객지에서 경찰로 근무하다가 북한군이 쳐들어 와분께 경찰들이 후퇴하다가 흩어져 불어서 낙오병이 되아갖고 집으로 왔는디, 그때 여기는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은께, 팽상 밑에 고구마 굴에가 숨어 있으면서 구멍만 째끔 남겨놓고 밀봉 해불고 부모들이 밤에 밥만 몰래 넣어주고 그랑께, 동네 사람들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제. 이 근방 공산주의 머리 쓴 사람들이 늘 쫓아 댕김시로 부모들한테 아들 내노라고 부모들을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고, 그라면 팽상 밑에 굴속에서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음시…
비가 안 와서 미양 나두면 잡피가 막 우거져. 그랑께 비가 안 와서 호멩이 모도 못 심고 남겨두면 그 자리에 피가 막 자라. 미양 잡히면 먹을 것이 없어. 그라면 거그서 자란 피라도 먹어야 해. 피는 무지하게 독한 놈이라 그 씨가 삼 년이 지나도 다시 또 나와. 그랑께 피는 어디에서도 자라지. 안 뽑고 나두면 시커멓게 뒤덮여. 피를 베 와서 볕가테 나 뒀다가 잘 마르면 털어. 마대 푸대에 놓고 털면 알갱이가 떨어져. 피 알갱이가 서숙 쌀처럼 생겼는디 거 보다 조금 큰데, 고놈을 도구통에 넣어 갈아. 틋트윽 갈아서 푹 삶아 먹…
각시바우는 흥리에 있어. 본래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디, 지금 것은 그냥 보통 돌이여. 여그 와서 들은 얘기로는 어른신들이 그래“저그 각시바우를 땅 주인이 없애 버렸는디, 그 후로 계속 젊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총각도 비명횡사하고, 처녀도 갑자기 죽어 나갔다”하더라고. 그래서 이것이“각시바우가 없어져서 그란다”하고 난리가 났제. 이것저것 해가 많으니까 안 되것다 싶어서 촌장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바위를 새로 갖다 놓고, 제를 지냈제. 신기하게도 그 후에는 마을에 우환이 없어졌다고 그래. 정월 보름이면 동네 사람들이 다 가서…
내가 인공 때 스무 살이었는디 용케 살아났어. 여그 사람들은 인공 때 많이 죽었는디, 빨치산한테 당하고 군인한테 당하고 양쪽에서 다 당했어. 죄 없는 여그 사람들만 불쌍한디 사실은 여그 현지 사람들한테 당한 것이 젤 크지. 나는 식구들 데꼬 쩌기 내산으로, 남송 뒷산으로 많이 도망 다녔어. 그때는 다들 새벽밥 먹고 산으로 도망갔어. 산에 가면 여그 저그 사람들이 숨어있어. 집에서 싸간 꽁보리밥 먹고, 거그서 골짜기 물 먹고 견뎠는디, 배가 고플 때는 별 것을 다 먹었어. 나무껍질도 많이 먹었어. 누릅나무 껍데기를 깨물면 찐덕찐덕…
일정 때는 참말로 어렸웠어라. 세 끼 밥은커녕 한 끼 보리밥도 힘들었당께. 아침에는 들보리 갈아서 쑥 썰어 넣고 물 많이 붓고 죽 써서 먹었는디, 거울에 비칠 정도로 밀간 죽을 써서 묵었당께라. 보리 가루에 쑥을 찧으면 더 찰져. 낮에는 밥 대신 고구마 한 두 개먹고 나무 하러가. 저녁에는 그래도 누가 볼까 무서워 평상 그런 거 좁쌀, 보리쌀 넣지. 그때는 고기도 못 잡고, 망둥이 하나 잡으면 크게 유세하고 그랬지, 소라나 낙지 같은 것은 구경도 못 했어. 바닷가에 가면 바위에 백화 붙은 것 까먹고, 파란이 긴 해초 같은 것 뜯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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