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말
나주검환
우리 외할머니한테 들었는데, 기동에 광산김씨가 터를 잡은 얘기여. 내 증조 외할아버지가 나주 공산에서 동학군을 조직해갖고 나와서 장흥 석회들에서 전면전을 벌이는데, 그때 그 석회들 전투는 말이 전투제 학살이어라, 학살. 왜냐하면 그 당시 병영에만 해도 총을 쏘는 소총수가 열아홉 명이나 있었고, 일본군들이 최신 미군 미제 자동 기관총을 걸어놓고 갈겨부렀어라. 그래갖고 들판에서 싸우는데 그 당시 동학군은 기껏해야 장총이나 칼 창 그런 것 밖에 없었잖아요. 들판에서 자동 기관총으로 갈겨분께, 그대로 걱서 다 죽어 부렀어라. 그야말로…
우리 시누가 스물세 살 때였는디, 우리 막둥이 뱃을 때, 사람들하고 신덕으로 맛을 잡으로 가고 우리 시누는 안집 방에가 있었어라. 인자 맛을 잡어서 여그 봇 둠벙있는 데까지 옹께, 사람들이“집이 시누가 약 먹고 죽어 부렀다”고 그래서, 어뜨게 내가 놀렸는가, 이 뱃속 애기가 모닥모닥 해가고 배꾸리에가 딱 멈쳐 불든만. 그래갖고 한참 있응께, 배가 풀어집디다. 그래갖고 안집에 온께, 밤에 묻을 라고 한담 시로 나보고, 임신까지 한 사람한테 아니 죽은 사람을 화장을 시키라고 하드란께, 얼굴에다. 내가 스물일곱 살 먹어서 이 막둥이를…
어른들한테 들었는디, 우리 신덕정 마을이 소쿠리 명당이라고 합디다. 재등에서 보면 양쪽이 폭 올라있고 가운데가 쏙 들어가 있어서 영락없이 소쿠리 맨키로 생겼지라. 영산호 막기 전에는 쩌그 아래까지 뻘밭이었어라. 여기는 덕진에서 물이 내려온께 덕진강이라 했지라. 나주 영산포에서 내려오는 물은 영산강이고. 여기 뻘이 좋으니까 고기 맛이 좋았지라. 존 고기는 여기서 다 나왔어라. 궁궐로 진상까지 했다는 숭어도 많이 잡혀서 어란도 많이 만들었어라. 숭어알을 여기에서 제조해 갖고 팔았지라. 장어도 무지하게 잡았지라. 숭어라고 해서 다 …
우리고장에는 웬만한 마을이면 으레 정자가 하나씩 있지만 우리 동네에는 희한한 내력을 가진 정자가 있는디, 저기 마을 안쪽 절터가 있던 자리. 밭 언덕에 아담한 정자가 있는디, 그 정자 이름이 관해정이여. 한자로는 볼 관, 바다 해, 정자 정자로 바다를 관망하는 정자란 뜻인디, 그것이 본래 이름은 관해정이 아니고 후회할 회자를 써서 관회정이라 했어. 그러니까 한자로 볼 관에 후회할 회, 정자 정을 썼다는 얘기여, 그 뜻은 후회를 되돌아보는 정자라는 뜻이제. (조사자 : 얼마나 오래된 정자인가요?) 응 그것이 시방 있는 것은 얼마 오…
옛날 조선시대 나주목사를 지낸 임구령이란 분이 저쪽 구림에 와서 정착했는디, 주변 지세를 살펴보니 상대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졌다 하는 것을 보고, 양장리와 동호리 사이의 물목이 수 백간 밖에 안 되어서 그곳에 제방을 쌓으면 많은 농토를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재산을 쏟아 부어 농토를 만든 이야기가 있어요. 내가 어릴 적 들었을 때는 무지하게 신기하고 무섭기도 했는디, 지금 생각해도 그것이 사실이라 믿어져. 나만 아니고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다들 믿을 것이요. 아줌씨도 들어보셨지라? (마을회관에 함께 있던 아주머니들 : 지남제…
조선의 삼당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고죽이 구림에 뿌리 내린 이야기 할까요. 어릴 적 고죽은 나주에서 수학했어. 병조참의를 지낸 아버지가 전라도 수사로 근무할 당시 나주 인근 선비들이 교유하던 장춘정에서 공부 했는디, 이때가 대략 열 살 쯤 이어. 그랑께 아버지가 정해준 곳에서 유학한 셈이지. 그런데 여그를 드나들던 임억령의 눈에 들었어. 아무래도 똘똘한 서울 아이가 맘에 들었던 모양이어. 당시에 이미 당나라 시를 척척 외우고, 어른들과 시를 나누고 했은께. 그 때 임억령은 고죽을 조카사위로 점찍었어. 구림에 사는 동생 임구령 목사가…
쩌그 보이는 저 들이 석회들이고 건너편이 나주 석회마을이여. 그전에 나주 목사가 여그 남해포 신당에 제를 모시로 올라면 저 들을 건너서 왔제. 나주 목사가 지금 같으면 도지사라고 하드만. 그라면 국가 안정을 빌기 위해서 남해 신에게 제를 모시로 옴시로 말 타고 가마 타고 횃불을 들고 왔다고 했어. 그때는 저쪽에서 나주 목사가 이리 배내골로 건너오는 길이 흙으로 딱 되어갖고 뚝이 있었어. 그라고 석회 거그는 다리가 없고 그란께 큰 돌로 다리식으로 만들어 놨어, 그리 건너오라고. 지금은 하천을 준설함시로 다리가 없어져 부렀제. …
쩌그 보이는 저 봉이 옥녀봉이고, 쩌가 베월이여, 베월. 베 실인 올을 말 하제. 그라고 여기가 방두고, 그렇게 보면 옥녀가 베를 짜는 형국이제. 그래서 여그를 베틀, 베월이라고 부르고 있어. 그라고 베 짜면 올이 쩍 벌어지고 그래서 쩌가 이월제고, 거가 베 짬시로 물을 뿌린 우물도 있어. 그라고 여그 보다 북받등 이라고 해, 북받등, 베 짜는 북. 여그는 방두고, 그랑께 옥녀가 베 짜고 있는 형국이 틀림없제. 쩌그 옥녀봉 옥녀는 나주 반남이고, 나머지는 다 시종 금지리여. 옥녀봉 저 여자 뒤로 쭉 뻗어있는 잔등이 옥녀 댕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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