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남송 취정마을 전경
[영상] 남송마을
남송마을
남송취정마을 입구
지금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큰 권력을 가지는 것으로 여겨지잖아. 그런디 예전에는 대동계에 들어가는 것이 큰 것이였제.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사성받이라고 해주최씨, 낭주최씨, 조씨, 박씨 만 들어갔지. 쌍놈이나 돈 없으면 들어갈 생각도 못했제. 그리고 들어가려면 지금의 국회 청문회 하듯이 사람을 앉혀두고 심사를 봤제. 그래가지고 합격되면 투표를 했어. 흑백 바둑돌을 가지고 주머니에 넣었어. 돈도 많이 썼제. 흑돌은 떨어지는 것이고, 백돌은 들어가는 것이지. 그곳에 들어가고 싶어서 아주 난리였어요. 꼭 지금…
고죽 할아버지를 죽도록 사랑했던 홍랑 할머니가 구림에 온 일이 있어. 고죽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십여 년을 시묘살이를 하던 홍랑 할머니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몸을 숨긴 적이 있어. 그때 고죽과 홍랑 사이에 최즙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디 임란 때 의병으로 참여해서 이쪽 전라도 지방까지 내려왔어. 홍랑 할머니는 아들을 찾아 내려오다가 여기 상대포에 들어왔어. 저기 남송정 뒷산 불무등에 올라가 고죽 본가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해. 저기서 보면 구림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여. 그 어덕에는 바우덩어리도 많았어. 본댁에는 고죽 할아버…
큰길 얘긴디, 지금 쩌어 앞에 들어왔던 포장도로가 산중길이지만 옛날에도 솔찬히 큰 질이였제. (조사자: 남송리에서 이쪽으로 해서 중산마을 가는 길 말입니까?) 그라제, 옛날에는 다 걸어 다닝께 장흥 유치 사람들, 나주 다도 사람들이 다 재 넘어 다녔제. 전에는 여그가 겁나 큰 질이어. 나 어려서 어른들이 꼭깽이로 만들기 시작한 질인디, 전남도에서 임도로 개통을 했어. 아마 여그가 영암군에서 유일하게 포장이 안 된 질이어. 월암마을에서 중산까지는 영암군인디 포장이 안 돼 있고, 중산에서 유치 쪽도 아직 비포장 길이라 우뻑찌뻑 해.…
옛날 꼰날에 금정면 연소리에 늙은 부부가 살고 있었는디, 늦도록 자식이 없었어요.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저기 문수봉아래 쌍계사라는 절이 지금은 없어져 버렸는데 그곳에 절을 새로 지어 공을 드리면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재산 없는 재산 다 털어서 절을 짓었어요. 그런데 스님 말처럼 다 짓고 난께, 신기하게도 애기가 들어섰다고 해요. 달이 갈수록 배가 태산처럼 커져서 장사가 태어날란갑다 했는데, 출산을 하니 아들이 셋이나 연거푸 나온 것이었어요. 아들 셋이 나온거지요. 아들 셋 쌍둥이가 다들 잘 자랐는데, 그…
내가 소화 오년생인디, 주민증에는 생일이 늦어. 어릴 적에 일제를 거치고, 젊은 시절에는 인공을 피해 살다가 늦게 군대 갔다가 스물아홉에 제대 했는디, 다 나보다 어린 사람들하고 같이 다녔어. 어려운 시절이라 공부도 못하고 배운 게 없어서 군대에서 조금씩 배운 것이 다여. 특별한 재주가 없응께, 이일 저일 하며 살았제. 저수지 맹그는 일도 많이 했지. 여그 저그 찾아다니며 흙도 파고, 바지기로 나르기도 하고, 별 일을 다했어. 여기 우리 마을 저수지는 일제 때 맨들었는디 나도 일했어. 마을에는 함바집도 있었어. 공사인부들이 거그서…
내가 인공 때 스무 살이었는디 용케 살아났어. 여그 사람들은 인공 때 많이 죽었는디, 빨치산한테 당하고 군인한테 당하고 양쪽에서 다 당했어. 죄 없는 여그 사람들만 불쌍한디 사실은 여그 현지 사람들한테 당한 것이 젤 크지. 나는 식구들 데꼬 쩌기 내산으로, 남송 뒷산으로 많이 도망 다녔어. 그때는 다들 새벽밥 먹고 산으로 도망갔어. 산에 가면 여그 저그 사람들이 숨어있어. 집에서 싸간 꽁보리밥 먹고, 거그서 골짜기 물 먹고 견뎠는디, 배가 고플 때는 별 것을 다 먹었어. 나무껍질도 많이 먹었어. 누릅나무 껍데기를 깨물면 찐덕찐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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