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산단(용앙리)
대불산업단지
우리 마을에서 경찰 가족 일곱 명이 한꺼번에 처형당한 얘기를 했지만 더한 얘기가 있어라. 인자, 그런 일이 있자, 경찰과 군에서 인민재판에 참여했던 마을 사람들을 가만 안 두겠다고 벼렀을 것 아니야. 그래서 소탕 작전이 있었어라. 해군이 배로 들어와 해창에 푸고, 독지만에 푸고, 밀고 오는 것이여. 소문이 돈께, 너도 나도 봇짐 싸서 피난 가기 시작했는디, 나도 어무이 손잡고 동생이랑 피난 갔어라. 우리 마을까지 해군이 점령했는디, 우리 마을 끄트머리에 똥산이라고 있어라. 거기에 빨치산 한 명이 숨어 있다가 해군 소령이란 사람을 …
육이오 때 고려대 댕기던 사람이 외갓집이 약산이었는디, 목포로 해서 올라갈라고 그랬든가 우리 앙감마을에 왔어라. 거그서 목포 삼학도로 건너가는 배를 타려고 했는디, 여그에 토벌대가 있은께 냅다 도망쳤어라. 젊고 유복한 사람이라 토벌대에 걸리면 죽겠구나 싶어서 그랬는지 저쪽 용당 산 쪽으로 도망갔어라. 우리 집 앞이 뻘인디, 그 사람들이 뻘을 가로질러 도망가고 한 이백여 명이 쫓아감시로“저놈 잡아라”하고 총을 탕탕 쏘고 그랬어라. 거그가 지금 대불공단이 들어선 곳이어라. 고려대 다닌 청년하고 다른 일행하고 두 사람이 도망 갔는디,…
저기 대불대학교 있는 산이 무지 음침했어라. 동네 아제가 하는 말이 거그서 무데기로 죽었다 그래. 아제가 술 마시고 오다가 거기 지날 때면 도팍을 들어서 막 던지면서“저리 가 저리 가”그랬당께. 나는 무서워서 그 옆으로 지나가도 못했어라. 인공 때 그랬다 해. 저쪽 용당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토벌대가 온다는 소문이 들린께, 저기 삼호 사람들이 무서워서 여기저기 산속으로 숨었는디, 피난민들이 용당 반대 방향으로 이쪽으로 왔어라. 아무래도 독천 쪽으로 도망가야 안전하다 생각해서 그랬겠지. 그리 갈라믄 요기 범슬목을 지나야 해. 범슬…
여그로 시집와서 고생 지긋지긋하게 했소. 시집와서 얼마 안 돼서 남자는 군대 가고 없고 어린애 키우면서 바닷가에 나가서 농게 잡고, 사랑기도 잡고, 밥만 먹고 나가서 기 잡아서 내다 폴았어라. 먹을 것도 없던 시절이라 한 푼이라도 벌라고 젊은께, 일 무지하게 했어라. 오가리섬에 가면 기가 빨개 버려. 거 한 쪽 집게다리가 삐란 기, 농게란 것이 천지여서 삐라게 보인당께. 그것을 하루에도 백 근도 잡고 이백 근도 잡을 때가 있어. 정신없이 잡아서 목포에 내다 팔어. 여기서 발동개를 타고 가. 목선에 발동기를 단 것이 발동개여. 이 …
여그 하구언 안 막았을 때까지 여기 나불도 주변하고 대불공단 일대가 다 바닷물이 들어왔어. 물 빠지면 갯벌이 드러나서 이것저것 해산물이 많이 나왔어. 대불공단이 뻘 밭이었당게. 걱서 농게 많이 잡았어. 대갱이랑 운저리를 말도 못하게 많이 잡았어라. 요 앞 솔댓거리에는 여러 척의 배가 있었는디, 풍선도 있고, 중선배도 있었고, 통통배도 있었어라. 풍선은 쬐간한 배고, 중선배는 고기잡이 하는 배여. 노를 젓기도 하고, 발동기를 단 통통배도 있어. 그런 배들이 여그 솔댓거리에 묶여 있었어라. 풍선에 뜰망을 단 배들이 여그 저그 많이 …
여기서 나가서 우측으로 큰 길 따라가면 대불산단 시작하는 곳이 띠밭곶인디, 거그에 띠가 무지하게 많아서라. 가을이면 띠를 낫으로 벼다 말려, 그라믄 가에 이파리 부분이 없어지고 가운데 띠가 남는디, 그것을 엮어서 발을 만들어. 나이 드신 분들이 하루 대여섯 장씩 만들었어. 겨우내 만들면 용돈 벌이는 된께. 그걸로 해우 뜰 때 사용해. 그것을 요런 사각 틀을 올리고 해우를 뿌려서 덕장에 꽂아서 말려. 여그 비행장 옆에 덕장이 빼곡했어라. 이 근방은 뻘이 좋은께 해우가 맛있어. 바다에서 해우를 건져 와서 역서 물로 헹구고, 양지 바…
옛날에 어느 승려가 암자를 찾던 중에 월출산에서 출발하여 북일종면 서창리 사동마을을 둘러보고 난전리, 돈저두마을, 절골을 거쳐서 풍관이 수려한 고메섬에 들어 갔는디, 거기에 암자터로 적합한 암굴이 있어서 거그서 기거하며 수행하기 시작했어. 전에 가보면 질다란 바우들 투성이에 요리조리 끼어 들어가면 바우 틈사구니를 지나 쬐금한 암자가 있었어. 거그 암자 뒤에 커다란 바우가 있었는디, 바우 아래 두 개의 구녕에서 쌀과 물이 나왔어. 거그서는 승려와 상좌가 하루에 세 번 씩 식사할 만한 정도의 쌀과 물이 나왔는디, 어느 날에는 암자에 …
효자 김해김씨 농은 비갈명낭성(朗城) 서쪽에 효자 김해김공이 있으니, 집안은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요, 네 임금을 모신 공신의 후예가 되는 집안이다. 대남(大男)은 현손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깨끗함이 있었고, 증손은 통훈대부 석하(錫河)이며, 손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영태(永 泰)의 아들이다. 공의 휘는 상윤(相奫)으로 자는 장선(長善)이며, 농은(農隱)은 그 호이다. 가문의 명성을 이어서 오랜 후대에까지 더욱 이름이 있게 하였다. 아아! 공은 7~8세부터 온화하고 유순한 기색이었고, 아침저녁으로 부모를 수발드는 범절은 전해 내…
영암문화원 열람실 | 대표자 : 원장 김한남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로55
TEL : 061-473-2632 | FAX : 061-473-2732 | E-mail : ycc2632@hanmail.net
Copyright © 영암문화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