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마을 일대
명동마을
내가 여기서 살면서 저 위쪽 마을 묵동이라는 이름이 하도 신기해서 그 내력을 알아봤어요. 묵동은 원래 먹뱅이라고 했는데 이 마을이 유난히 해가 빨리 진대요. 그래서 저 아래 동네 사람들이“먹뱅이는 애기들 갤혀 입혔냐”라고 놀렸다 해요. 그만큼 빨리 어두워진께 아기들 기저귀 갈아입히고 잠자리 준비했냐는 뜻으로 그런 모양이요. 옛날에는 묵동 안 골짝에서 숯을 구웠다 해요. 그 쪽은 숲이 울창해서 숯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숯을 만들면서 자연히 먹도 만들었나 봐요. 먹은 한자로 묵이잖아요. 인공 전까지 마을 위에 숯구댕이가 있…
오봉산 자락에 있는 명동리의 가장 깊숙한 동네가 옥정이라는 마을이여. 그랑께 신북면에서 가장 깊은 산골짝에 있는 이 마을은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아서 어디 하나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마을이여. 그라고 마을 이름대로 이 마을에 있는 샘에서 나오는 물은 오봉산의 온갖 좋은 약기운이 다 들어있어서 옥정 마을 샘물로 한약을 달이면 한약의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이곳에는 용한 한의원이 자리 잡고 금정면 암챙이에서 훈련 중인 동학농민군의 건강을 지원하고 있었어. 그랑께 동학농민이 일본군하고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면 명동리로 가면 치료해준다고 사…
호랭이 있는 곳에는 삘간 치마 입고 가면 안 돼라. 옛날에 저기 타로골에 호랭이가 살았는디,“삘간 치마 입고는 타로골 넘어가지 말라”는 말이 있었어라. 호랭이가 삘간 치마를 좋아하는 것은 어디서 봤는가, 젊은 여자들이 삘간 치마를 많이 입었는 모양인디, 호랭이가 빨간치마 입은 젊은 여자를 좋아해라. 전에 동네 아줌마가 삘간 치매를 입고 타로골 넘어 명동에 가다가 호랭이한테 물려갔어라. 남편하고 오다가 아줌마만 잡아 갔어라. 호랭이는 젊은 여자만 좋아하지 늙은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합디다. 전에는 삘간 치마에 남색 저고리 …
나는 서울서 신랑을 만나서 신북면 명동으로 왔는데 처음 시댁에 인사하러 올 때 잘 차려 입고 비싼 부츠 신고 왔어요. 왠지 명동이라 이름이 고급스럽잖아요. 신북에 도착했는데 그 당시 명동 쪽에는 길을 다 파 놓아서 택시가 못 들어간다고 하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걸어갔는데, 다 자갈길에 십리는 걸어갔어요. 명동이라고 가 봤더니 하늘하고 땅 밖에 안 보이데요. 자갈길이 어찌나 험했던지 아무리 좋은 땅을 밟고 가려해도 온통 자갈이라, 시댁에 도착했더니 부츠가 너덜너덜 해서 버릴 지경이었어요. 지금 돈으로 하면 오십 만원이 넘는…
여그는 비가 안 오면 금방 가뭄이 들어서 땅이 쩍쩍 마르고, 비가 오면 물이 방천 나고 둑이 터지고 그랬어. 비가 하지, 소서까지 안 오니 초복, 중복 다 돼서 호멩이모를 무던히 많이 심었어. 비가 안 와도 그나마 촉촉한 곳은 호멩이로 구녁을 파서 심고, 땅이 아예 벌어지면 미양 잽혀 놓은 데도 있고 그라제. 여자들이 나란히 앉아서 호멩이로 구녕을 파서 모를 심어. 남자들은 심부름만 하지. 앉아서 심는 것은 남자들이 안 해. 모 쪄 나르지. 물도 나르고 그래. 모 같이 독한 것이 없어서 비가 안 와서 빼뺏 마르다가도 비가 오면 …
여그 오봉산 일대가 이삐기로 소문난 자리여라. 그랑께 명동이라 했지라. 그란디 저기 오봉산 골짜기에 백 년 묵은 지네가 살았는디 무지하게 컸다 합디다. 달리는 것이 호랭이 같아서 쫓아오면, 사람을 따라 잡아서 그냥 잡아먹어 버린다 했어라. 커다란 지네가 도술을 부려서 나무로 변했다, 지네로 변했다 한께 잡을 수가 없지라. 꼿꼿히 서 있으면 영락없이 나무처럼 보인께, 그라고 컸다고 합디다. 그라니 어찌게 산에 가서 나무를 하겄소. 그랑께 여그 산은 나무가 무성한디, 사람이 살 수 없어서 다들 벌벌 떨어지라. 하도 못 살 것은께 …
증 이조참판 행 황해도관찰사 박공 신도비명(전액)유명조선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 행 통정대부 수황해도관찰사 겸 병마사군절도사 박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영 경연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신흠 지음 족증손 통훈대부 행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태유 씀 보국숭록대부 영돈녕 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민유중 전서 씀흠(欽)이 상투를 올리고서 장안에 유학할 때 함께 사귄 이들은다 당시의 명류이거나 혹은 행실로 혹은 재주로 혹은…
효자 김해김씨 농은 비갈명낭성(朗城) 서쪽에 효자 김해김공이 있으니, 집안은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요, 네 임금을 모신 공신의 후예가 되는 집안이다. 대남(大男)은 현손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깨끗함이 있었고, 증손은 통훈대부 석하(錫河)이며, 손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영태(永 泰)의 아들이다. 공의 휘는 상윤(相奫)으로 자는 장선(長善)이며, 농은(農隱)은 그 호이다. 가문의 명성을 이어서 오랜 후대에까지 더욱 이름이 있게 하였다. 아아! 공은 7~8세부터 온화하고 유순한 기색이었고, 아침저녁으로 부모를 수발드는 범절은 전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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