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룡마을 미륵불
미륵동
우리 마을 입구에 커다란 불상 보셨어요. 기와집 안에 장정 크기 두 배 정도 되는 불상이 있는데, 그것이 보통 절의 불상이 아니고 어떤 집안에서 일으킨 아기 낳게 해준 미륵불이라고 해요. 실제로는 불상처럼 생기진 않았는데 다들 미륵불이라 하더라고요. 지금으로부터 약 삼백년 전, 이 마을에 살던 정씨 부인이 애기가 없어서 지성으로 불공을 드렸더니 미륵불상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고 그리 했더니 아이가 생겼다 해요. 정씨 부인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귀하게 얻은 아들 후손이 없어 대신 마을 사람들이 미륵불상에 매년 제사 지내 주도록 부탁…
긍께, 저 옛날 여그 바닷가에서 사람들이 옹구도 굽고, 무역하러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 때 얘기여. 인근 섬 지역은 물론이고 중국까정 사람들이 옹구 폴러 댕기기도 하고, 중국 것들을 가져오기도 했다니께. 나도 들은 얘기인디, 어느 날 한 승려가 와서 미륵불을 아느냐고 물었대. 여그 인근 사람은 아닌 듯하여, 사람들은 수근거렸지. 미륵이라고? 석가모니불에 대해서나 겨우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아주 생소한 말이었제. 근디 때마침 어떤 사람이‘자기가 미륵이라고 했다는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어. 뭔 나라를 세웠다는 사람인디, 자기가…
우리 마을 앞에는 벼락바위가 있어. 옛날에 마을 건너편에 있는 마산 아래에는 집채만 한 바위가 있었는디, 어느 날 그 바위에 큰 벼락이 떨어졌어. 그 때 그 바위의 한 조각이 떨어져 날아와 우리 마을 앞 길 옆에 내리 꽂혔는디, 그것이 벼락바위여. 사람들은 그것을 박선암라고 했어. 배를 묶는 바위라는 뜻이지. 왜나면 그 때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와서 풍선배가 마을로 들어올 때 그 벼락바위에다 배를 맸다고 해서 그래서 그렇게 부른 거여. 그란디, 그곳이 육지로 변하고 도로가 나면서 그 앞으로 자동차가 댕긴 후로 그 벼락바위 …
여그 오봉산 밑에 백룡이 살았다 해서 백룡산이라 하는 곳이 있고, 쩌그 국사봉 밑에 가면 청룡이 살았다 해요. 이 뒷산이 백룡산이라는 곳인데도 크게 나은 것도 없는 이유가 여그는 백룡에 등거리고, 쩌그 넘어 영보 마을이 앞쪽이여. 그랑께 영보는 부촌이 되었고, 여그는 크게 뭐는 없었는디, 그래도 이쪽은 금이 나온 곳이 많아요. 백룡산 너머 가는 곳에‘가는재’가 있는디, 거 뭐요 세재라고도 해요. 옛날에 신북에 갈 라믄 그리 다 넘어 다녔서라. 거기에 금 파는 굴이 많았는디, 일본 놈들이 시작해서 커다란 굴들이 많이 있었고, 그래서…
원래 예부터 우리 마을은 쌍정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다섯 개의 작은 소마을이 있었는디, 그 이름이 쌍정, 미럭굴, 수박굴, 앵개 그리고 갱변이란 마을이어. 우리가 어릴 적에 왜 마을이 이렇게 불리었는지 궁금해서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라고 불렀던 거라고만 어른들이 말씀하셨어. 그랑께 그란갑다 하고 그렇게 부르면서 살았는디, 한 오십 년 전에 쌍정제 저수지가 생긴거라. 그제서야 우리동네 사람들은 마을 이름 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안거라. 다섯 개 마을 중에서 수박굴이라고 부리는 동네가 냉중에 저수지 속에 잠긴 것을 …
석가 열반 후 2349년 갑신년 8월 13일 용화초회(龍華初會)를 공양하였다. 고을말 북촌 □을포(□乙浦)에서 미륵계(彌勒契) 안의 천만인(발원자는) 천을말분(千乙末分) 김대□(金大□) 김금물(金今勿) 신일소(申日召)· 김동화(金冬火) 김양병(金洋並)이고,화주(化主)와 새긴 사람은 급암(及岩) 진암(珍岩) 대□(大□)이다.釋迦湟槃後二千三百 四拾九年甲申八月十三日 埋 香龍華初会供養 之□古乙 未 北村去□乙□浦 埋置契□ 古乙未堵人 化主 及岩 同金德中洋並 同金□泄 冬火 同申上佑昆召 同金炳□分勿 同金□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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